금세기 초의 제주 민란을 소재로 한 <이재수의 난>의 도입부는 유장하고 비범하며 초월적이다. 까마귀가 제주 상공을 날아 한라산 꼭대기에서 구름을 뚫고 내려오면 제주섬의 풍광이 화면에 펼쳐진다.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의 영화화를 83년부터 별러온 박광수 감독의 미학적 야심은 시작부터 계시적이다. 요컨대 그는 땅 위를 굽어보지만 금방이라도 하늘로 박차고 비상할 것 같은 까마귀의 시점처럼 위에서 아래로 굽어보되, 결코 세세한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프랑스 신부들의 후원을 받는 천주교인들에 맞선 유생들과 민중들의 싸움을 다루면서도, 외세와 토착 또는 근대와 봉건의 충돌이라는 대주제보다는 제주섬 민중 전체의 희생에 주목하면서 굳이 피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고 민란을 이끈 이재수의 내면 묘사에도 무심한 편이다.
<이재수의 난>은 그 당시 민란의 정황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무뚝뚝한 화술이라는 비난을 들을 만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박광수 감독과 직접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가 당시 민란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개인적인 드라마를 나름대로 소상히 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무심하게 지나가는 듯이 보이는 이야기의 흐름에 고도로 절제된 이미지를 끼워넣으면서 생략과 압축에 방점을 뒀다. 영화에서 이재수는 계속 달린다. 군수의 전갈을 전해주기 위해 달리던 통인 이재수는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역사의 흐름에 몸을 의탁하고 민중을 이끄는 장두 이재수가 돼 말을 달리고 있다. 문제는 이야기를 제쳐두고 이미지에 치중한 영화로는 지나치게 많은 제작비(32억원)가 들었으며, 압축적인 이미지의 서술 흐름으로 감당하기에는 민란이 너무 많은 극적 이야기를 안고 있는 소재라는 것이다. 이재수 개인의 묘사와 수십명의 등장인물 집단의 묘사를 조화시키는 가운데 역사적 사건을 배경에 깔아놓으려 하면서도 이야기 전개의 리듬에 아랑곳하지 않는 긴 화면의 호흡은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영화의 관망하는 듯한 스타일은 때로 깊은 슬픔의 감정을 망설이듯 결정적인 순간에 폭발시킨다. 효수당한 이재수의 머리에 까마귀가 앉고 화면이 바뀌면 감독의 시점을 대신한다는 그 까마귀는 현재의 제주도 해안 상공을 날고 있다. 박광수의 다른 어떤 영화보다 섬뜩하고 황폐하며 아픈 결말이다. <이재수의 난>은 민란에 가담한 인간 군상을 주로 화면의 점으로 놓아두고 살육과 희생과 파국을 낳았던 그 집단적인 움직임, 거대한 역사 흐름의 덩어리를 먼 거리에서 색과 면으로 분할한 특이한 ‘스펙터클’이다. 이 영화는, 박광수 미학의 중간기착지이자 한국 영화산업규모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무척 값비싼 실험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