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에 열린 케이원(K-1) 월드그랑프리 서울대회. 사진 한겨레
지난 8월28일 ‘세기의 대결’이 있었다. 프라이드FC에서 벌어진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 미르코 크로캅의 대결이다. 76년에 열린 이노키와 알리의 시합처럼 세계적인 화제라고 할 수도 없고, 프라이드가 과연 세계 ‘최고’인가라는 것에도 의문은 있다. 다만 수다한 격투기의 전문가들이 참전하여 승부를 겨루는 이종격투기 대회 중에서 프라이드는 충분히 일류라 할 수 있다. 이종격투기 팬이라면 누구나 고대하던 시합이었다. 나는 심정적으로 크로캅의 승리를 바랐지만, 효도르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론 우연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승부는 개관적인 전력과 전략에 의해 결정된다. 이번 시합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크로캅도 멋진 경기를 펼쳤지만, 급격한 체력 저하로 효도르에게 무릎을 꿇었다. 타격기와 그라운드 기술, 위기관리능력과 맷집 그리고 체력 등 전체적인 밸런스에서 효도르가 앞서고 있었다.
이종격투기를 좋아하는 것은,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잡다한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고, 이종격투기도 그냥 스포츠로서 즐기는 것이다. 프로레슬링이 스포츠와 쇼의 결합인 것에 비해, 이종격투기는 가장 단순한 스포츠다. 원시시대에는 맹수와 혹은 다른 부족과 싸우기 위해 익힌 기술일 것이고, 그리스 시대에는 판크라티온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격투’다. 전쟁무술에서 스포츠로 정착된 무에타이나 유술처럼, 스포츠의 시작은 생존을 건 싸움인 경우가 많다. 아니면 종교적 의식이거나. 어쨌거나 모두 우아하게 변질되게 마련이지만. 이종격투기도 많은 시간을 거치면서 스포츠가 되었다.
아무리 피가 흘러도, 이종격투기는 스포츠다. 그걸 야만적이라고 부른다면,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야만적이라 멸시하는 것과도 같다(사실 인간이란 존재가 야만적이긴 하다). 그런 사람은 <파이트 클럽>을 볼 필요가 있다. 왜 싸움 같은 것을 하느냐고 물으면,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워왔고, 이른바 문명사회에서는 그런 본능이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은 생존을 위해 전진한다.
사실 이종격투기를 그리 거창하게 변호할 생각은 없다. 그냥 스포츠일 뿐이다. 효도르와 크로캅의 목적이 강해지겠다는 욕망이건, 부와 명예이건, 크게 상관은 없다. 내전 중인 크로아티아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강해지겠다고 결심한 크로캅의 역정이 고무적이긴 하지만, 그건 외적인 조건과 부가설명일 뿐이다. 그저 자신들이 가진 힘과 기술 그리고 전략을 가지고 ‘적’과 맞서 싸우는 것. 가장 단순하게 벌이는 싸움. 순수하게 ‘강함’을 지켜보는 것. 그 단순함이 이종격투기를 보는 즐거움이다. 효도르와 크로캅의 경기는, 그 강함의 실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