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미래의 관객에겐 <링>이 하나도 안 무서운 영화가 될지 모른다. 집집마다 비디오데크가 있어서 비디오 빌려보는 일이 일상이 되는 시대가 아니라면 말이다. <링>의 공포가 강력했던 이유는 저주의 비디오테이프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전염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를 비디오로 보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온다면 <링>의 귀신은 얼마나 억울할까? 기술발전에 뒤떨어진 원귀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른 자신을 업그레이드해서 인터넷 환경에 적응하는 길뿐이리라.
얼마 전 <워싱턴포스트>는 비디오테이프가 죽어가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VHS 대여총액은 2003년 들어 DVD에 추월당했고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무게중심도 VHS에서 DVD로 옮겨갔다. 사태의 단면을 보여주는 예는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가 DVD로만 출시된다는 보도다. 아예 비디오 출시를 하지 않는 영화가 생긴다면 VHS의 생산과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자명한 결과가 될 것이다. 먼 나라 얘기가 아닌 것이 주변을 둘러보니 비디오는 어느새 시대에 좀 뒤떨어진 매체로 취급받고 있다. 연휴를 즐기는 방법을 묻는 이번주 ‘리플을 달아라’ 코너에 독자 여러분이 올린 글 가운데도 비디오나 실컷 보겠다는 대답보다 못 봤던 DVD를 챙겨보겠다는 대답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잡지를 만드는 입장에서도 예전엔 명절 연휴마다 숨은 비디오 찾기 코너를 마련했던 반면 요즘엔 다른 엔터테인먼트를 소개하는 데 치중하게 된다. 이렇게 된 데는 비디오가게에 가도 예전에 나온 비디오를 구하는 일이 전보다 훨씬 어려워진 탓이 크다.
지난 몇년간 수많은 비디오가게가 문을 닫고 업종전환을 시도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런 사태로 얼마나 많은 테이프가 사라졌을까이다. 요즘 길을 가다 비디오가게 앞에 테이프를 쌓아놓고 파는 풍경을 자주 본다. 가끔 괜찮은 영화가 있나 살펴볼 때가 있지만 건질 수 있는 물건은 드물다. 그래도 눈길이 가는 건 저 테이프 무더기 속에 보석 같은 영화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과거에 비디오로 나왔으나 아직 DVD로 나오지 않은 작품 가운데 수많은 영화가 이제 더이상 구할 수 없는 작품이 됐다. 외화도 외화지만 한국영화도 구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70년대부터 90년대 한국영화 가운데 가까운 비디오가게에서 구할 수 있는 테이프는 실로 몇개 안 된다(최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래영상이라는 비디오가게의 경우는 한국영화 테이프를 전문적으로 모아놓았다고 한다). 문득 예전에 활동했던 영화인들의 푸념이 떠오른다. “한국영화 필름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아나. 상영 끝나면 밀짚모자에 두르는 장식으로 써버렸어. 그렇게 다 없어졌지.”
옛 영화의 필름들이 유실된 것처럼 지금 옛 영화의 비디오들이 사라지고 있다. 비디오라는 매체가 명을 다하는 마당에 당연한 일인지 몰라도 옛날 영화인들이 한탄했던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CD가 나오면서 LP를 몽땅 처분해버리고 뒤늦게 후회한 경험이 떠오른다. 가끔 LP가 그리울 때처럼 비디오테이프를 그리워할 날도 오지 않을까. 이번 추석 연휴엔 비디오가게에서 내놓은 테이프 더미를 뒤지는 일을 한번 해볼까 싶다.
PS. 추석 연휴를 앞둔 <씨네21> 사무실에 사과박스 하나가 배달됐다. 사과박스라는 말에 혹시 어느 기업에서 비자금을 보낸 게 아닌가 싶었으나 정말 사과 18개만 들어 있었다. ^^ 정기독자 노경아씨가 <씨네21> 만드느라 수고한다고 보낸 것이다. 지면을 빌려 감사히 잘 먹겠다는 인사를 드린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