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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칼럼] 최진실이 포기하지 못한 캐릭터 맹순, <장밋빛 인생>

아줌마에게 하는 말,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인기라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플란다스의 개> 마지막 회를 보게 됐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보다가 어느새 엉엉 소리 내가며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란 일이 있다. ‘이 나이에 추억의 만화를 보며 대성통곡이라니! 아니 눈 쌓인 거리를 맨발로 걸을 건 또 뭐야. 울리고 말겠다는 의도가 너무 뻔하잖아!’ 머리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눈에서는 눈물이, 코에서는 콧물이 흘러내렸다. 아, 그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란. (나중에 학교 선배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자신은 울지 않으려고 그날 일부러 나가 놀았다고 하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장밋빛 인생>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네로’가 맨발로 눈발을 헤치며 걸었듯이, 최진실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다리를 절며 걸었다. 게다가 남편의 발길질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니 '이 지경이 되도록 뭐하셨습니까' 라는 예의 그 반응.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캐릭터'를 만들어보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건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찡하기도 했으니, 마치 <플란다스의 개> 마지막 회를 보며 울던 그때와 비슷했다고 할까. 물론 그때처럼 펑펑 울지는 않았지만.

너무하다 싶은 감은 있으나 맹순은 매우 현실적인 캐릭터이기는 하다. 대리운전해서 받은 돈을 택시비로 날릴 수 없어 먼 길을 걸어오는 일이나, 한밤중에 일 나가는 와중에도 남편 욕 먹이기는 싫어 '이것도 다 심심해서 하는 일이에요. 우리 남편은 하지 말라고 해요' 말하는 거나, 무척 공감이 가는 상황들이었다.

그러나 맹순의 현실은 엄연히 ‘드라마’다. 그녀의 처절하리만치 불행한 인생이 만약 <KBS TV 인간극장>의 내용이었다면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슬픔, 불행, 하나 같이 다 못되기 만한 시댁 식구들. 그 모든 하소연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 이야기는 드라마다. 그렇기에 나는 맹순의 불행을 묘사하는 방식이 과장되어 있지는 않은지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시댁 식구들이나 남편, 그의 애인을 볼 때면 그러한 의문은 더욱 짙어진다.

모욕을 당할수록, 인기는 올라갔다

채시라 주연의 <애정의 조건>도 비슷한 경우였다.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장면이나, 공공장소인 카페에서 남편의 애인으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고 화가 나 있는 그녀를 남편이 억지로 끌어내는 장면이나, 그 역시 과하다 싶은 장면이 많았던 드라마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모욕을 당할수록, 인기는 올라갔다'는 점이다. 채시라는 아이 낳고 오랜만에 복귀하면서, 철저히 망가지는 드라마 <애정의 조건>을 고른 바 있다. 오연수도 마찬가지. 그녀가 오랜만에 TV 앞에 나서면서 꼽은 작품은 <두번째 프로포즈>. 그녀 역시 바람난 남편을 둔 망가진 아줌마 캐릭터를 연기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었다.

최진실이 MBC와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장밋빛 인생>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작품 자체가 좋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녀가 정말로 포기하지 못한 부분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캐릭터'인 맹순이 아니었을까. 이혼의 아픔을 겪으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금씩 잊혀지기 시작한 최진실에게 '맹순'은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카드였으리라고 본다. 누가 봐도 그 역할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동정표를 얻어내기 쉬운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남자는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 카피로 유명했던 왕년의 스타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인기라' 라는 말을 듣는 아줌마를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엎고 망가져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스타의 현실이 씁쓸하기도 하다.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최진실 같은 ‘왕년의 스타’가 겪는 일일 때에는 인생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쩐지 허탈함이 느껴진다. 더구나 울고 있는 맹순의 모습을 볼 때마다 시퍼렇게 멍이 든 얼굴로 병원에 실려갔던 최진실의 얼굴이 겹쳐 보일 때면, 어쩔 도리 없이 씁쓸해지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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