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이유란인데요, 이선희씨 내 인생의 영화에 글쓴 적 없죠? 이번 주에 쓰세요. 내일 오후까지 보내주시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재미있게 써주세요.”
내 인생의 영화? 재미있게? 새로 맡은 작품의 포스터 작업으로 인해 설악산 흔들바위만한 돌덩어리에 머리가 깔려버릴 참이었는데, 이젠 그 돌덩어리 위에 이유란 기자님마저 올라 앉아버린 기분이다. 하지만 같은 유부녀 동지의 고마운 명령인데…. 다른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사무실 구석의 컴퓨터 앞에 쪼그려 앉는다. 내 인생의 영화라.
하긴, 나는 영화를 선택한 적이 없었는데? 그저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영화보기를 즐겼던 나는 이 지면을 들렀던 수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TV 주말영화의 단골객이었고 극장의 불이 꺼지고 영사기가 돌아가는 순간을 몸서리치게 좋아했고 그 몸서리칠 정도로 좋아한 어둠 속에서 설레는 가슴을 부등켜 안고 보았던 그 수많은 영화들이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왔을 뿐인데. <로미오와 줄리엣>. 영원한 로미오인 레오나르도 파이팅에게 빠져 있던 중학교 시절 어느 한여름, 고교 시절 한달간을 우울증에 시달리게 했던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 헌터>, 그리고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에서 황기성사단 제작의 <푸른 옷소매>, 영원한 애마시리즈인 <파리애마>까지….
어쨌든 지금 나는 30대 유부녀 아줌마가 되었다. 울어 버리고 싶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일이 있다면 서른이 넘어서야 내 인생의 영화 한편쯤을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아닐까? 이제 여러분께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내 운명의 여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녀의 이름은 안토니아. 네덜란드 여성감독 마린 고리스의 <안토니아스 라인>의 주인공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안토니아>였는데 아카데미 외국어상에 노미네이트되면서 미국 배급사에서 <안토니아스 라인>(안토니아의 家系)으로 구체성을 부여했다. 아카데미가 이 멋진 영화에 최우수 외국어작품상(1996)을 수여했음은 물론이다.
영화가 좋고 광고가 좋고 사람이 좋아 시작했던 영화 홍보일. 하지만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일에 대한 막연한 열정 이상의 것은 나에게 없었다. 안토니아를 만나고 나서부터 나는 일에 대한 사명감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서히 안토니아에 빠지게 되었고 그녀의 삶과 사고에 전염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전염시키고 싶은 충동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비로소 나는 내 직업에 대한 흥분을 마음속에 간직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모습은 참 당당해서 좋다. 대가족을 이끌어 가는 가장이지만 그녀에게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가부장’의 모습 따윈 발견되지 않는다. 그녀는 강한 동시에 부드럽고, 엄격한 동시에 너그럽다. 힘있는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힐 때 그녀는 분노한다. 그녀의 넓은 품 안에서 모든 세상은 조화롭고 편안한 생명력을 지닌다.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이 <안토니아스 라인>을 보게 만들어야 했다. 며칠간을 쫓아다닌 끝에 언론사 여성 논설위원을 만나 안토니아에 대해, 진정한 페미니즘에 대해, 21세기 새로운 가치체계에 대해 어줍게 의견을 피력하면서 도움을 청하기도 했고, 사회단체들을 찾아다니면서 보도자료를 나눠주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기존 페미니즘영화에서 보이는 ‘남성에 대한 여성’, ‘남성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여성’이라는 2분법적 상투성이 <안토니아스 라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음을,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여성은 지적이고 조화로우며 생명력이 넘치는 인간 자체이며 남성은 삶을 구성하는 옵션일 뿐임을, 여기서의 ‘여성’과 ‘남성’은 ‘젠더’(Gender)로서의 구분이 아닌 그 젠더가 지니고 있는 특성 즉 ‘여성성’과 ‘남성성’을 말하는 것임을, 권위적이고 난폭하며 배타적인 남성성에 대한 혐오와 그것을 대체할 조화롭고 생명력 넘치는 여성다움(여성성)이 조율하는 세상에 대한 기대임을.
20세기를 마감하는 특별한 시점에 나는 안토니아의 여성성과 모성이 지배할 21세기를 기다리며 독자 여러분께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여성이라면 성 정체성에 대해 시야 밝은 관점을 안토니아를 통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21세기를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면 <안토니아스 라인>은 즐거운 혜안을 선사할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로 인해 무한경쟁과 성공 이데올로기가 판치고 있는 이 시대에, 안토니아와 함께 여는 21세기에는 모든 분들,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