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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공동감독 김태용ㆍ민규동
사진 이혜정김혜리 2000-01-04

“여성영화나 퀴어영화로 봐줬으면”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 이상한 선물 하나가 우리에게 배달되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라는 글씨가 총총 박힌 붉은 포장지 안에서 어떤 이는 ‘못생긴’ 공포영화 한편을 꺼내들고 투덜거렸지만, 어떤 이는 생경한 광채를 발하는 작은 보석을 발견하고 가슴을 두근거렸다. 이 묘한 선물을 보내 온 산타클로스는 영화아카데미 13기 동기생인 김태용(30) 감독과 민규동(29) 감독. <여고괴담…>은 16mm 단편영화 <열일곱>(1997), <창백한 푸른 점>(1998)에 이은 그들의 세 번째 공동 연출작이자 첫 번째 상업영화다.

“민선이(민아 역)가 잠깐 자리 비운 동안 심심해서 예진이(효신 역)랑 영진이(시은 역)랑 우리 둘이서 누가 많이 관객 끌어오나 경쟁했어요.” 개봉날 극장 앞에서 보낸 즐거운 하루를 천진한 말투로 들려주는 두 감독은, 맑되 가볍지 않았고 열정적이되 그 열정에 대해 담담했다. 마치 동급생 친구라도 되는 양 영화 속 소녀들에 관해 애정을 담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은, 그들이 지은 교실 속의 민아처럼 다감했고 지원이처럼 발랄했으며 효신이처럼 조숙했다. 그리고 겸손한 목소리로 여성영화, 퀴어영화, 성장영화의 범주를 향해 힘들게 노저어 온 <여고괴담…>의 여행담을 털어놓았다. “이거 괴담 아니잖아?”라는 불평 앞에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첫 상업영화를 세상에 내보낸 소감은.

김: 우리는 영화 만들기를, 좀 멋있게 얘기하자면 영화 보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화하고 장난치며 노는 축제 분위기가 아니다. 컴퓨터 통신에 들어가면 감상이 주르륵 뜨고 주변에 긴장하는 관계자도 많고. 시스템의 존재를 느낀다. 그래도 우리 마인드는 그대로지만.

민: 아침 일찍 영화를 찾아오는 관객이 신기하고 고맙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망하는 관객에게 미안하다. 영화가 재미없으면 그것도 일종의 죄악이겠구나 싶고.

-‘여고괴담’이라는 제목과 전편의 흥행 성적(서울관객 68만)이 안긴 부담이 컸을 텐데.

민: 사실 몇십만이라는 수치에 대한 감각이 없다. 그리고 별 몇개가 내 영화를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효신의 대사를 본뜬 말에 모두 웃음.) <여고괴담>은 두 가지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하나는 교육 환경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고, 하나는 무서운 영화라는 점이다. 그래서 관객은 이 영화의 의무와 정체성에 관해 이미 확신을 갖고 있으며 고정된 감상법을 갖고 영화를 보러 온다. 마치 바이킹을 타러 갈 때처럼. 반면 스타도 없고 특이한 얘깃거리가 없는 데도 관심을 끄는 것은 속편의 혜택이다. 익숙한 틀 안에서 색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 2편이라는 점이 운명적 딜레마다.

김: 여고라는 공간에서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반드시 괴담일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컨셉과 관련된다고 믿었다. 공포 장르의 미덕을 못 갖췄다는 질책이 있는가하면 공포영화 관습을 새롭게 변형했다는 칭찬이 있다. 둘 다 우리 영화가 적절히 소통되는 방식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끼리는 여성영화나 퀴어영화로 이해했으면 했다.

-넓고 얕은 반응보다는 좁고 깊은 반향을 구하는 영화로 보인다. 모험이라는 생각은 없었나.

민, 김: 그런 생각 안 했다. 만드는 입장에서는 누구나 특별한 이미지와 주제로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한국에서 10대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화두로 자연스럽게 드라마에 도달했을 뿐 별나게 파낸 건 없다. 다만, 피해자나 피교육자로만 그려져 온 10대들을 99년의 생동하는 이미지로 그리려 했다. 에너지를 갖고 밝게 살아가며 자기 욕구를 펼치는 데에 주춤거림이 없고 선생님과 대등한 인간 관계를 맺는 존재로.

-고교 시절이 궁금하다. 동성애적 유대의 경험도.

김: 학교에는 잘 적응 못했지만 시절 자체는 재미있었다. 기도원 가느라 학교를 빠져가며 성직자가 되려하기도 했다. 특별히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답답했다.

민: 2학년 때 세상과 제도, 선생님, 모든 것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한 순간이 있었다. 간혹 사고도 쳤지만 내내 모범생이었기에 무난히 넘어갔다. 졸아가면서도 자율학습 시간에 <데미안>, <죄와 벌>을 읽으며 그게 저항이거니 했다. 그때만큼 절실하고 죽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 절박함이 효신이를 통해 반영되기를 바랐다. 남학생들도 단짝이 있지만 성적 매력을 느끼고 이성애 형태의 감정을 가지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의리나 특별한 우정이라는 개념이고, 호의를 표시하는 방식도 여학생들과 다르다.

김: 남자들 관계는 좀더 폭압적이고 권력적이다. “여자 때문에 친구를 버려?”하는 식의 힘에 관련된 배타성이지 사랑이나 우정의 배타성은 아니다.

-여고 취재 과정이 낯선 세계로의 여행 같았겠다.

민: 영화가 내게 있어 늘 보는 것과 떨어져서 볼 수 없던 것을 찾아가는, 보던 돌멩이도 뒤집어보는 모험이었으면 한다. 내 영화의 관객도 그러기를 바라고. 여고생들과 같이 수업도 듣고 끈끈하게 더불어 생활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워서 연극반에 들어가 아이들과 영화를 만들었다. 민아, 지원, 연안의 세 캐릭터는 거기서 만난 친구들에게서 나왔다. 연안과 지원은 실명이고 몰래 카메라 에피소드도 실화다.

-첫 만남이 궁금하다. 서로를 본 순간 효신이처럼 종소리라도 들었는지.

민: 종소리가 아니라 카메라 플래시 소리였다. 아카데미 입학식에서 사진 촬영하는데 뒤늦게 헐레벌떡 뛰어오는 애가 있었다(민 감독은 96년 <지각대장 태용이>라는 단편을 만들었다). 살아온 역사가 비슷한 친구 같았다.

김: 첫 만남부터 불발된 애니메이션 준비까지 포함해 네 작품을 같이 만든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흘러왔다. 왠지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 같았다. 그나저나 나는 다른 애들이랑 잘 지낼 수 있었는데 규동이 덕분에 이지메 당한 피해자다. “애들이 보잖아” 하는 데도 자꾸 덤벼들고, “네가 창피해” 해도 무시하고. (웃음)

민: <여고괴담…> 찍으면서도 이 영화가 창피하냐고 태용이한테 따졌다.

김: 그래서 창피하다고 대답했는데도, 이 친구는 효신이랑 달라서 끝까지 안 죽더라. (폭소)

-오기민 프로듀서와의 작업, 상업영화의 첫맛을 총평한다면.

김, 민: 오 PD도 속편을 안일하게 만들 분이 아닌 만큼 조바심난 적도 있었을 거다. 시나리오가 덜 정리된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가 감독이 급박한 결정을 내려야할 상황이 많다보니 프로듀서가 힘들었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찍을지 불확실한 상태인데도, 전적으로 신뢰해 준 오 PD와 씨네2000 이춘연 대표, 시네마서비스 강우석 감독이 고맙다. 신기한 것은 충무로 제작자들은 간섭이 심하고 충무로 스탭들은 다 무섭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자율성이 컸고 스탭들도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있나 싶었다. 영화 만드는 감독으로서는 단편과 큰 차이를 못 느꼈다. 흥행 성적을 매긴다는 것 정도? 예전에는 시나리오 복사하는 것부터 비디오 떠서 운반하는 일까지 우리가 전체를 통괄하며 리듬을 파악했는데 이제는 연출자로서의 내용만 갖고 있다보니 전체 프로덕션을 끌어가는 감각은 굉장히 무뎌진 것 같다. 전에는 끝나고 조명기 나르지 않는 게 큰 소원이었는데… 집단 예술로서 성격이 훨씬 진해졌다고 할까.

-일은 어떻게 가르나.

민, 김: 태용은 운전을 잘하고 규동은 타자를 잘 친다. (웃음) 산업적 특성을 살리는 분업 개념이라면 우리 둘은 실패할 것 같다. 지난 4년간 아마 3년은 같이 지냈을 거다. 대화로 결정해야 할 부분은 이야기해서 해결하고, 만약 결정이 안 되면 상대방의 고집을 믿고, 그 외에는 각자 더 관심있는 부분에 치중해 끌어간다. 우리 장점은 많은 대화를 통해 화학 반응처럼 질적 비약을 이뤄내는 것인데, 이번에는 그런 여유가 없다보니 여느 때와 달리 다투기도 했다.

-영화로 들어가 보자. 제3의 여성 캐릭터가 두 여자의 관계를 관찰하는 구도가 민 감독의 단편 <허스토리>와 닮았다.

민: 애초에 <여고괴담…>은 삼각구도가 아니었다. 학교에 살면서 거리로 나가고 싶어하는 아이와 반대로 거리를 떠돌며 학교를 바라보는 아이를 1인2역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러다 효신이가 분열돼 민아라는 캐릭터가 나왔다. <허스토리>의 동성애 모티브는 이어진 셈이다. 그때는 어떤 선언을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동성애를 다루는 가장 도발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은 동성애를 정치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만들었다.

-시나리오부터 완성까지 영화가 많이 변했다는데.

김: 원래 일기 속 세계에서는 성장과 사랑이, 현실 속에서는 커뮤니케이션과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괴담이 양대 모티브였다. 왜 한 친구가 자살한 날, 물병이 떨어지면 왠지 무섭고 전깃불이 깜박여도 죽은 애랑 연관짓지 않나. 그렇게 그날 하루가 아이들 스스로 괴담을 만들어가는 과정처럼 보였으면 했다. 죽은 애를 다시 불러내지 않고 현실인 듯 환상인 듯 줄타기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도중에 시나리오가 압축됐다. 효신의 유년기를 보여주는 성장 코드가 축소된 대신 사랑의 비중이 커졌고, 효신이의 혼도 재림하게 됐다.

민: 귀신이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결국 귀신을 등장시킨 것이 제일 안타깝다.

-<창백한 푸른 점>이나 <열일곱>도 그랬지만, 다양한 매체와 기법으로 화면 전체 ‘때깔’을 바꾸는 실험을 즐기는 것 같다.

김, 민: 아직 치기가 있어서인가? 공동 연출도 남들은 꺼리는 일이라 더 재미가 있고, 남들이 스토리 위주로 영화로 생각할 때 영화 매체만의 고유한 특질을 구체적 영역에서 탐구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충돌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데에 욕심이 많다.

-교환일기 모티브는 소설 <회색 노트>를 생각나게 한다. 참조한 성장영화는 없는지.

김, 민: 소설은 못 읽어봤는데, 제목이 마음에 든다. 사실 ‘옐로다이어리’나 ‘노란 일기’ 같은 제목으로 바꿀 수 없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연출부 추천으로 <캐리>를 봤지만 별로였고, 에릭 종카의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은 10대 여성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시선, 공존하지만 화해할 수 없는 두 아이의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됐다.

-10대 여성들의 하위 문화는 스펙터클하지 않은 데다 사적 공간에 숨어 있는데.

민: 중학교 때는 오히려 여자애들이 와서 섹스에 관해 가르쳐 주면 남자애들이 얼굴이 빨개져 도망가곤 했다. 책상 위를 뛰어다니며 체육복 갈아입는 모습에 겁을 먹기도 했고. 싸움할 때 소녀들의 과격한 모습, 성적 욕구의 표현 등에 대해 솔직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김: 10대 여성의 하위 문화가 로맨스 문화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했다. 남자들이 성을 폭력적으로 이해한다면 분명 여자애들은 로맨스의 눈으로 성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을 로맨스 문화로만 묘사한다면 그 친구들이 갖고 있는 생기발랄함과 솔직함이 깨질 것 같았다.

-영화 속에 상징과 수수께끼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김, 민: 영화 속에서 새와 거북이, 사슴은 모두 네모진 공간에 갇혀 있다가 결국 탈출한다. 교실 안에 날아든 빨간 새는 한 아이의 죽음에 대한 ‘애원’일 뿐 아니라, 그 아이와 살아남은 아이들이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묻는 키워드다. 이 새의 깃은 소통의 통로였던 일기장 표지와 같은 색이다. 수조에서 벗어나 위태위태하면서도 무수한 발들에 밟히지 않고 돌아다니는 거북은 시은이 보호하고 있던 효신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실은 사슴처럼 거북과 새도 ‘이미지용 컷’으로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으면 했다. 물의 이미지도 지배적이다. 물은 첫 장면에서 자궁 속 양수의 느낌으로 쓰였는데, 한 세상에서 죽음으로써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는 ‘생일’의 이중적 의미를 머금고 있다. 도입부에서 민아가 수도꼭지를 틀다가 시은과 효신의 일기를 발견하고, 뒷부분에 가서 말랐던 수도에 다시 물이 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교사 캐릭터가 1편과 많이 다르다.

민, 김: 고 선생은 효신 안에서 자신의 고독과 무기력을 이해해 줄 유일한 친구를 보았던 슬픈 어른이다. 매혹당하고 끌려다닌 것은 고 선생쪽이다. 효신이 죽은 날까지 그는 자기 감정의 순수함에 대해 흔들림이 없었으나, 그날 처음 학생을 때려보고 자기가 학교에서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달은 후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착취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에 시은이 민아에게 “일기는 다시 쓰면 된다”는 텔레파시를 보내고 옥상으로 올라가는데.

김: 끊겼던 시은과 효신의 소통이 복구될 뿐 아니라 민아를 통해 확장된다는 의미를 주려 했다. 시은이 옥상 문을 열면 다시 낮 풍경이 보이게 한 것은 거기에 죽음말고도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리의 소망이 들어간 것이다.

-“아, 재수없어”하는 대사에서 보듯 10대들은 의외로 보수적이다. 교실 키스 신 촬영은 어땠나.

민: 교실의 키스 장면은 너무나 오랫동안 머릿속에 있었기에 내게는 숙원 같은 이미지다. 처음엔 두 배우가 걱정하는 기색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걱정한 것은 입냄새였다. 촬영중에 워낙 단짝이 되어 입맞춤도 어색하지 않았다.

김: 반 아이들이 질색하는 모습은 연기가 아니라 10대 단역 배우들의 실제 반응이다. (웃음)

-누구를 미워하고 무엇을 겁내야 하는지 분명치 않은 영화라 실망하는 관객도 있을 거다.

민: 가해자-피해자 대립은 없었으면 했고, 성적 고민하는 아이들의 어두운 얼굴이 한 장면도 없기를 바랐다. 그 주제는 많이 다뤄지기도 했지만 나도 대안을 모르겠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게 아니었다.

-파트너십의 전망은.

민, 김: (서로를 보며) 우리한테 기회를 다시 줄까? 다른 사람들의 기대가 있고 둘의 시간과 하고 싶은 작품이 맞는다면야. 공동 연출은 여러번 해봤으니 아트디렉터와 사운드 슈퍼바이저, 작가와 연출 등 다양한 관계로 한 영화 안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본다. 우선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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