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깊이, 오래 생각하면 성자나 철학자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소나티네>를 보면 성자나 철학자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소나티네>는 죽음에 대한 기타노 다케시의 사고가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이다. 언젠가 기타노는 자신의 최고작으로 <소나티네>를 꼽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오랫동안 죽음에 홀려 있던 자기 모습이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머리에 지그시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기타노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세번 반복되는데 한번은 총알없이 하는 장난이지만 두번은 뻥 뚫린 두피 사이로 피가 용솟음치는, 몸서리쳐지는 장면들이다. 그는 왜 이런 끔찍하고 살벌한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일까? 다케시는 야쿠자 보스 무라카와를 통해 그 의미를 돌아본다.
기타노 자신이 연기하는 무라카와는 처음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혈한으로 등장한다. 작은 조직의 보스지만 마음에 안 들면 최고 보스의 오른팔이라도 반드시 손을 봐줘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사람 죽이는 일은 파리잡듯 간단한 일이다. 자기 조직에 상납하지 않는 술집 주인을 크레인에 매달아 바다에 빠트린 뒤 무심하게 부하가 하는 이야기를 듣던 그는 “3분 지난 거 아니야”하고 내뱉는다. 술집 주인을 익사시킨 일이 아무렇지 않은 듯 “뒤처리 부탁한다”며 자리를 뜨는 무라카와의 내면은 기타노의 무표정 안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온도를 유지한다. 그런 그가 오키나와 해변의 안전가옥에 피신했을 때 보여주는 태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총을 갖고 장난치는 조직의 두 막내 앞에 러시안룰렛 시범을 보이고 가위로 오려 만든 종이인형을 갖고 놀며 모래사장에 함정을 파놓고 부하들이 빠지는 모습에 즐거워한다. 야쿠자다운 비정함과 잔인함 뒤에 감춰진 천진난만한 동심이 푸르름으로 가득한 오키나와의 하늘과 바다 앞에 옷을 벗는다. <소나티네>는 이런 무표정과 웃음의 선명한 대조에서 출발해 폭력과 순수의 경이로운 조화를 만들어간다. 온몸이 낙서판인 듯 문신투성이인 야쿠자가 양손에 짝짝이를 들고 광대춤을 선보이는 것처럼 삶은 온통 한몸에 붙어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양면성에 둘러싸여 있다. 그런 두 측면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나티네>의 폭력장면들이다. 슬로모션으로 액션을 늘려 즉각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오우삼 스타일의 정반대편에서, 웅장한 성당에서 세례받는 아기와 무자비한 살육전을 교차시키는 <대부>의 바로크적 우아함과도 달리, 기타노는 아주 간결하고 당황스러울 만큼 느닷없는 방식으로 총격전 시퀀스를 연출한다. 일례로 무라카와가 배신자를 응징하러 호텔로 찾아갔을 때 이뤄지는 총격전은 방번호를 잘못 알았다며 허탈하게 돌아가는 그 순간 예기치 않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발생한다. 전주곡 없이 터져나오는 격렬한 폭력의 하모니가 평온함 속에 숨은 불안과 격정 안에 잠자는 달관한 자의 표정을 함께 실어나른다.
극단적인 대비에서 제3의 의미를 발견하는 기타노 스타일은 비극과 코미디의 절묘한 배합에서도 발견된다. 무라카와를 사랑하게 된 여인이 돌아오지 못할 남자를 기다리며 해변에 서 있는 장면엔 얼핏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지만 비통한 표정으로 돌아서 걷던 그녀가 무라카와가 장난으로 만든 함정에 빠질 때는 웃지 않을 수 없다. “감독 기타노가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를 살해하는 영화”라는 한 일본평론가의 논평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소나티네>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이런 희비극을 가능케 하는 편집의 마술이다. 수평선과 해변과 돌담이 화면 위 아래를 나누는 정적인 구도에서 정수리 한가운데 구멍이 뚫리는 급작스런 살인장면으로 옮겨가는 기타노 특유의 편집은 뭐라 형언하기 힘든 매력을 선사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 첫 장면부터 다시 보고픈 유혹이 강렬해지는 것도 이런 편집 스타일에 기인하는 바 크다. 시종 화면에 혹시 묻어 있을지 모를 슬픈 표정과 눈가의 물기를 남김없이 제거해버린 뒤, 의식하지 못한 채 차곡차곡 쌓인 감정을 폭발시키는 엔딩은 그 긴 여운에서 비로소 ‘죽음에 관한 명상’이라는 주제를 드러낸다. 이 언덕만 넘으면 반겨줄 여인이 있는데, 죽은 자들의 피를 씻어줄 푸른 바다가 있는데, 뛰어놀 수 있는 동심의 고향이 있는데 무라카와는 자기 머리에 총을 들이댄다. <소나티네>는 천국의 아이가 되기에 너무 늦은, 세상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어른을 위한 비가다.
기타노 다케시의 흉포 3부작
슬픔, 잔인하고 무표정한
데뷔작 <그 남자 흉포하다>, 두 번째 영화 <3-4X10월>, 네 번째 영화 <소나티네>는 흔히 기타노 다케시의 ‘흉포한 남자 3부작’으로 불린다. <소나티네>의 주인공 무라카와처럼 앞의 두 영화의 주인공도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남자다. <그 남자 흉포하다>의 주인공인 아즈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티 하리>에 비견할 만한 폭력적인 형사. 지나친 폭력으로 경찰 내부에서도 골칫거리로 통하는 아즈마는 어느 날 마약조직의 끄나풀을 검거한다. 그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마약조직의 핵심으로 접근해가자 마약조직은 아즈마의 여동생을 납치, 윤간하는데 이순간부터 아즈마는 복수의 화신이 된다. 여동생과 마약조직원을 모조리 살해하고 자신도 처참한 최후를 맞는 아즈마와 그의 죽음 이후 신참형사가 아즈마의 뒤를 이어 같은 길을 걷는 마지막 장면은 형사와 범죄자의 견고한 먹이사슬 관계를 보여준다. 애초 후쿠사쿠 긴지가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다가 일정문제로 주연을 맡은 기타노가 갑작스레 연출까지 하게 된 <그 남자 흉포하다>는 기타노 영화 중 유일하게 자신이 각본을 쓰지 않은 작품. 하지만 그가 연기한 캐릭터 아즈마에는 이후 기타노 영화를 관통하는 무표정한 잔인함이 들어 있다.
<3-4X10월>은 <소나티네>와 비슷한 구도를 가진 영화. 도쿄와 오키나와라는 두 공간이 <소나티네>처럼 일상과 휴식, 삶과 죽음이라는 대척점을 보여준다. 주인공 마사키는 주유소에서 일하는 청년. 야쿠자들이 자신과 친구들을 위협하자 그는 오키나와로 총을 구하러 간다. 오키나와에서 만난 야쿠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총을 손에 넣은 마사키는 복수를 감행하지만 총 한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하고 실패한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한 마사키는 여자친구와 함께 주유소 탱크로리를 몰고 야쿠자 본부를 행해 돌진하는데 마지막 장면에 가서 모든 것이 마사키의 백일몽이었음이 밝혀진다. 폭력장면을 과감히 생략하는 이 영화의 편집 스타일은 <3-4X10월>이 기타노 영화의 진정한 출발점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기타노는 여기서 오키나와에서 마사키가 만난 야쿠자 두목으로 출연했다. 물론 ‘흉포한 남자 3부작’은 기타노의 7번째 영화 <하나비>로 이어진다. <소나티네>의 무라카와가 직업만 바꾼 듯 보이는 니시 형사는 기타노의 무표정을 극단적인 허무주의로 밀어붙인다. <하나비>를 먼저 본 한국 관객에겐 <소나티네>와 <하나비>를 비교하며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