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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린의 <불의 검> [3] - 뮤지컬 <불의 검>
사진 이혜정김현정 2005-09-05

뮤지컬 <불의 검>은 어떤 모양이 될 것인가

소박하지만 활달하고 눈물나는 무대

김혜린은 “<불의 검>은 활달한 야만의 노래다”라고 썼다. 그 노래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불의 검>은 <비천무>의 한시(漢詩)가 그랬듯, 노래로 감정을 압축하고 숱한 사연을 회고하곤 한다. “사랑 노래만 부르다 죽은 가난한 가수, 바람찬 언덕에서 홀로 죽은 전사, 그 위에 작은 들꽃이 피었다고, 바람이 내게 전하지… 슬픈 노래, 사랑의 노래, 바람의 노래.” 붉은 꽃 바리가 아라와 아사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부르는 노래. 그러므로 뮤지컬 <불의 검>은 성급하게 걱정하는 시선보다는 편한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래에 기대기 때문에 뮤지컬 <불의 검>은 서사를 다소 생략해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선이 굵다고 해도 순정이라는 라벨을 달고 있는 <불의 검>을 발견한 사람은 의외로 남자다. 제작사 코코즘의 정진욱 대표는 상고사를 소재로 삼은 무용을 기획하려고 했지만 좌절만 되풀이하던 무렵, 친구로부터 <불의 검>을 추천받았다. 그는 2003년 추석연휴 동안 <불의 검>을 모두 읽었고, 애초 마음에 두었던 상고사를 넘어 남녀와 민족을 모두 아우르는 사랑을 발견했다. 그렇게 그는 집전화 말고는 연락할 방법이 없던 김혜린 작가를 서너달 동안 수소문해 해를 넘기고서야 만났다. “처음 만났는데도 잘 맞는 구석이 있었는지 소주 한잔하면서 작품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가 여리게 보여도 남자보다 담대하고 의리있는 면이 있다. 당신이나 나나 바라는 건 비슷하지 않은가,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 싶다, 는 말로 유혹했다.” 생각보다 쉽게 판권을 얻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험한 돌밭뿐이었다. 창작뮤지컬은 어디에 가도 제작비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불의 검>은 아무르의 바위궁과 카르마키의 신궁을 대칭을 이루는 무대로 삼고 최대한 단순하고 소박하게 배경을 지을 예정이다. 아라가 아사를 찾아 헤매고, 아무르가 옛 영토를 되짚으며 수복전쟁을 치르는 탓에 무대전환이 빨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산이 부족한 까닭이기도 하다. 에인절 투자를 받은 정진욱 대표는 “영상물을 만들어 배경을 대신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제작비가 부족해서 포기해야 했다. <불의 검> 같은 작품엔 20, 30억원을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부족한 제작비에서 벌써 3억원을 초과한 상태고 그건 고스란히 빚이다”고 말했다. 신궁을 짓던 아무르 노예들이 가라한의 지휘를 받아 탈출하는 장관도 있지만 <불의 검> 출연배우가 40명 정도에 그치는 것도 그에겐 아쉬움이다. 다행히 김명곤 국립극장 극장장의 호의로 초연인 창작뮤지컬로는 드물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6주 동안 대관할 수 있었다. 1500석 규모의 해오름극장을 채우기 위해선 관(官)의 배려와 민(民)의 후원이 부족하다고 투정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투가 잦은 <불의 검>은 한국 검법의 기원에 속한다는 무예 비천사신무를 안무에 더해 사람은 땅에 발붙이고 있으나 검은 자유롭게 공중을 나는 춤을 만들었다. 8월8일 제작발표회에서 시연한 검무는 좁은 공간이었지만, 한번은 정갈한 여인들의 몸짓으로, 한번은 생사를 다투는 사내들의 결투로, 그 전체를 엿보게 했다. <태풍> <청년 장준하>의 작곡가 김대성의 노래 몇곡도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어릴 적부터 <불의 검>을 좋아했다던 작곡가를 한명 더 섭외해 음악을 보완하고 끝도 없이 대본을 수정하고 있는 과정이 <불의 검>의 현재 좌표. 만화 <불의 검>은 김혜린 작가 스스로 신파라고 부르나, 눈동자가 아닌 마음에서 눈물이 나도록 만드는 비감 어린 이야기이고, 각색하는 이들을 바위처럼 누를 수밖에 없는 그늘이다. 그 눈물샘을 발견한다면 뮤지컬 <불의 검>은 서사시가 되기엔 부족한 규모이더라도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음악도 듣기 전에 이야기에 먼저 끌렸다

뮤지컬 <불의 검>의 두 주인공 임태경과 이소정 인터뷰

<불의 검>을 읽었던 많은 이들에게 아라와 아사는 정말 존재하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검고 긴 머리카락, 무언가를 삼키고 있는 듯한 눈동자, 착한 손끝. 원작자 김혜린이 이 모든 걸 그려놓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육신으로 그 그림을 능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소정과 임태경은 그저 열심히 하고 있었다. <미스 사이공>으로 가녀린 동양 여인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던 이소정과 연기를 해본 적이 없지만 제작자가 “노래 안에서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고 있었다”고 전하는 임태경. 그들은 9월1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수천년 전 연인들의 노래와 사랑과 전투를 맑은 목소리로 들려주게 된다.

-아라와 아사는 지나치게 많이 알려진 인물일 수도 있다. 당신들은 아라와 아사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소정: 아라는 모든 게 궁금한 여인이다. <불의 검>은 장엄하게 말하자면 사랑이고 희생이겠지만, 내겐 아라가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소녀 같기도 했다.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그녀는 산마로를 만나면서 여인이 되고 모험심과 대담한 심성으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순수하고, 어찌보면 극단적인 캐릭터다.

=임태경: 가라한 혹은 산마로는 야생을 품은, 자연에 가까운 남자다. 한없이 순수하지만 자신만의 법칙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적용시킨다. 자신의 민족인 아무르를 향한 사랑 같은 것 말이다.

-두 인물 모두 감정을 곧이곧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많은 걸 참으면서 살아간다. 배우로선 그런 인물이 연기하기에 더 힘들 듯하다.

=이소정: 되도록이면 표현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라의 사랑은 너무 커서 보여줄 수가 없다.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못해도 노래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그랬지만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연기보다 사랑하는 연기가 더 힘들다. 작은 소녀가 전쟁을 겪고 어머니를 잃었는데, 그러니까… 때를 제대로 만난 거지(웃음), 때를 만나 모르는 것처럼 살았던 감정이 터지는 거다. 거기까지 가기가 힘이 들 것 같다.

=임태경: 나는 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아사는 연기를 하면 안 되는 인물 같다. 말이 없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내공으로 표현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못하니까, 차라리 닮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비슷한 점을 하나라도 찾아내려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동생하고 함께 유학을 갔다. 아버지가 우리를 두고 떠나시면서 “이제 네가 부모다, 믿는다” 딱 두 마디를 하셨다. 그 말 때문에 여자 보기를 돌 같이 하면서(웃음) 동생을 지켜주려고 했다. 아버지의 말이 힘이 되기도 했지만 어깨가 짓눌렸다. 그런 점은 아사하고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아사는 목동이 되고 싶어했던 온화한 남자인데 민족을 지키는 짐을 떠맡아야만 했다. 그 무게가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그런 느낌을 살리고 싶다.

-이소정씨는 창작뮤지컬 경험이 없는데 작품의 질이 불안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임태경씨는 뮤지컬이 처음인데 어떻게 이 작품에 합류하게 되었나.

=이소정: 불안한 건 언제나 비슷하다.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도전하고 싶은 여지를 주기도 한다. 문제는 공연에 들어가면 잠을 자지 못한다는 거다. 석달을 공연하면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불의 검>은 음악을 듣기도 전에 스토리에 먼저 끌렸고, 지금은 노래도 좋아한다. <불의 검>을 읽었다면 알겠지만, 그 대사 참 좋지 않나. 뮤지컬은 장르의 특징 때문에 이야기의 굵은 줄기만 유지하게 되지만, 가사가 좋은 대사를 살려줄 거다.

=임태경: 방송국 프로듀서 몇분이 이소정이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너와 참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듀엣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다가 이소정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됐다. 그 인연으로 <불의 검> 대본을 받았다. 내가 뮤지컬 하고 싶어하는 걸 알았나보다.

=이소정: 전혀 몰랐는데. (웃음)

-아사는 노래와 연기뿐만 아니라 무술도 보여주어야 한다. 첫 번째 작품에서 너무 많은 걸 배워야 하는 건 아닌가.

=임태경: 그렇진 않다. 나는 무예를 무척 좋아하는데 작품을 하면서 새로운 무예도 익힐 수 있어서 기쁘다(그는 태권도 유단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전사와 무사다. 아이들이 프로레슬러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고,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자아와 자존심을 지키면서 싸우는 남자들이 좋다. <불의 검>에서 가장 끌린 점도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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