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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국 장편애니메이션 기상도 [1]
김도훈 2005-08-23

<아치와 씨팍> <오디션> 7전8기 스토리를 통해 보는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기상도

비바람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번 넘어져도 일어난다. <원더풀 데이즈>와 <엘리시움> 등 블록버스터급 애니메이션의 흥행 실패로 꽁꽁 얼어붙었던 장편애니메이션 시장이 움츠린 어깨를 펴기 시작했다. 부족하나마 정부의 새로운 정책 지원이 이어지고, 충무로 메이저 제작사들이 애니메이션 시장 진출을 선언하고 나선 덕이다. 음지에서 투자의 광명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는 따스한 양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2005년 하반기의 기대작 <아치와 씨팍>과 새롭게 제작이 재개되는 <오디션>의 지난했던 프로덕션 과정을 살펴보고, 주목할 만한 차기 프로젝트들을 통해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향후 기상도를 살펴본다.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은 어디까지 왔나, 라고 물어본다면 숫자와 숫자로 만들어진 시장의 논리를 되새김질 아니할 수 없다. 어디 한번 책을 꺼내들어보자.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05년 애니메이션산업 백서>에 따르면 2003년 애니메이션 제작시장의 규모가 전년보다 25% 정도 증가했다고 한다. 뭔가 희망적인 냄새가 난다. 라이선스 수출액이 45%나 증가한 것도 꽤 눈여겨볼 만하다. 하청 제작을 노동력 저렴한 중국과 동남아에 빼앗기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 애니메이션의 창작력이 점점 발전해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저임금 노동력을 혹사시키며 얻은 ‘세계 최대 애니메이션 하청국가’의 명성을 세월에 흘려보낼 시기가 온 것일까. 애니메이션계를 비추는 청신호는 이뿐만 아니다. 문화관광부가 최근 발표한 ‘2005년 만화·애니메이션·캐릭터산업 육성 지원사업 계획’도 있다. 문광부는 25개 사업에 총 125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며, 특히 애니메이션 산업의 육성을 위해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스튜디오’를 설립해 올해 중에 문을 열 계획이다. 이미 2005년 1월에는 숙원이었던 국산 애니메이션 전용관 ‘서울애니시네마’가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자리를 잡았다.

대작 흥행 부진으로 자금시장 여전히 ‘꽁꽁’

<원더풀 데이즈>

<오세암>

그런데 숫자와 숫자로 구성된 책을 덮고 바라본 한국 장편애니메이션 세상은 여전히 회색이다. 묵은 상처를 다시 벌려 젖히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전년보다 25%나 애니메이션 제작시장의 규모가 성장했다는 2003년은 사실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미래에 암운을 드리운 한해였다. 150억원의 제작비가 투여된 <원더풀 데이즈>는 겨우 30여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45억원짜리 3D애니메이션 <엘리시움>은 4천여명의 관객을 끌어들이며 참패했다. 두 작품은 수익모델로서도 뼈아픈 실책이었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에 드리워진 관객의 불신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평단의 따스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못난 배급의 논리에 밀려 일찍 문을 닫아야 했던 <오세암>의 사례도 있다. 이처럼 연이은 흥행성적 부진은 한창 제작에 박차를 가하던 장편애니메이션들에 후폭풍을 일으켰다. 특히 투자사의 손길을 기다리던 애니메이션 업체들은 그나마 진행되던 투자마저 허공으로 날아가버리는 고통을 겪고 있다. <빙고>를 준비하고 있는 씨즈엔터테인먼트는 “예산을 30억원 정도로 아주 작게 잡았고, 영진위에서 4억원을 지원받기로 되어 있다. 이처럼 여건이 잘 갖추어진 경우지만 투자사들은 선뜻 투자를 꺼린다. <원더풀 데이즈> 같은 작품들이 흥행에 부진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아드레날린 드라이브>를 준비 중인 파파빙고의 이상구 대표는 “영진위에서 자금을 지원받아서 파일럿을 만들었지만, 그 이후로 투자가 여의치 않아서 해외전시회를 다니면서 마케팅을 진행 중”이라며 얼어붙은 투자가 녹기만을 기원하고 있다. 물론 그런 기원조차 쉽게 보답을 받기는 여의치가 않다. 이상구 대표는 “얼마 전 콘텐츠진흥원과 창투사에서 세미나를 하면서도 사실 애니메이션쪽은 투자를 받는 게 힘들 거라고 딱 까놓고 이야기하더라”며 곤혹스러워했다. 그에 비하면 TV용 애니메이션은 확실히 정책적 지원의 덕을 입고 있다. 전체 방송 분량의 1%를 국산 애니메이션으로 충당하도록 만든 ‘방송총량제’가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편애니메이션은 돈이 많이 드는데다 제작기간도 길다. 인내심과 믿음이 있는 투자자가 아니면 선뜻 나서기 힘든 분야다. 게다가 내년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이 전면적으로 개방됨에도 불구하고 영진위와 문광부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김병헌 경기디지털아트센터장은 “정부가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현재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영진위를 통해서 문광부에서 산업지원을 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문광부 장관이 약속했던 마이너쿼터 제도조차 진전이 없다. 유통과 쿼터제를 통해서 극장 애니메이션의 산업적 성공모델뿐만 아니라 유통의 활로도 같이 펴줘야 한다. 여기에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사활이 걸려 있다.”

충무로 메이저 장편애니메이션 동참, 유통 새활로

<럭키 서울>

그런 가운데 최근 충무로 메이저 영화사들이 장편애니메이션 제작을 발표하고 나선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MK픽쳐스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오돌또기와 손잡고 <마당을 나온 암탉>을 만들 예정이며, 싸이더스는 경기디지털센터, 동국대학교와 함께 ‘산(産)·학(學)·관(官) 협약식’을 열어 장편클레이메이션 <럭키 서울>의 제작을 선언했다. MK픽쳐스는 “극영화 제작사의 마케팅의 경험과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노하우가 결합하면 효율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원더풀 데이즈>나 <엘리시움> 같은 작품들이 시장에서 실패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는 기획, 시나리오와 마케팅 부문의 취약점을, 충분한 경험을 지닌 충무로 메이저 제작사들이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메이저 제작사들이 자체적으로 스튜디오를 꾸리는 형식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전문 제작사나 감독과 손잡고 나섰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선구 PD(<아치와 씨팍>)의 말처럼 “실패와 성공을 거듭해온 한국 애니메이션 인력은 이미 충분한 기술을 지니고 있으며, 애니메이션은 경험있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산업”이다. 이미 든든하게 성장한 애니메이션 제작인력의 인프라를 제대로 활용하는 전략이야말로, 애니메이션 업계의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메이저 제작사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오세암>처럼 언론의 호평을 받고도 개봉 초반 흥행 실패로 인해 배급의 기회를 빼앗기는 사례도 메이저 제작사가 이미 구축해놓은 안정된 유통망을 통해 어느 정도 개선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이 비참할 정도의 흥행성적을 거둔 큰 이유 중 하나는 안정된 배급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시장의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충무로 제작사들의 장편애니메이션 도전은 이제 첫 걸음마를 뗀 상태다. <오세암>의 성백엽 감독은 “충무로 메이저 영화사들의 진출은 당연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지만, 이제 막 시작한 단계이니까 당장 두드러지는 효과는 없는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가능성을 지켜볼 참이다. <에그콜라>를 준비 중인 인디펜던스의 손지훈 실장은 정착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메이저 자본의 도입이 당장 급한 투자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충무로 거대자본이 주는 영향은 지금으로서는 없다. 물론 좋은 일이긴 하지만 현재로선 한국 장편애니메이션 시장 자체가 많이 죽어 있는 상태다. 특히 한국 장편들이 심각할 정도로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투자 자체가 확 줄어버린 상태 아닌가.” 과연 장편애니메이션 업계의 상처를 충무로 메이저 영화사들이 조금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상업적인 성공 모델이 하나 정도는 터져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믿을 만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사례가 있어야 투자가 다시 몰려올 것이라는 전망이다. “과거만 계속 돌아보면 어둡고 암울할 뿐이다. 해외시장도 마찬가지다. <마리 이야기>나 <원더풀 데이즈>가 국내에서는 실패했지만 해외시장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해외투자는 오히려 늘어났다. 이성강, 성백엽, 김문생, 이런 아티스트들이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점점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고 본다. 다만 그걸 국내 투자자들에게 돈으로 환원해줘야 하는 일이 남은 건데. 그 시기가 바짝 다가왔다고 느낀다.”(김병헌 경기디지털아트센터장)

독창성과 상업성 갖춘 작품 줄줄이 진행중

<아치와 씨팍>

<오디션>

그런 점에서 <아치와 씨팍>과 <오디션>을 위시한 차기 장편애니메이션 프로젝트들은 주목할 만하다. <아치와 씨팍>은 관습적인 한국 애니메이션의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있지만, 상업적 성공을 거둘 만한 잠재력이 충분한 작품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으며, 65% 정도의 공정을 끝마친 <오디션>은 (비록 발간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100만부가 넘게 팔린 문화 콘텐츠를 장편애니메이션으로 전환하며 부수적인 캐릭터 사업에도 도전할 만한 원 소스 멀티유스의 전형적인 사례다. 특히 최근의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이 단단한 시장 친화성을 지닌 작품들이 아니었다는 점을 되짚어본다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두 작품이 상당한 상업적 매력을 갖추고 있음은 환영할 만하다. <오세암>의 성백엽 감독과 <마리 이야기>의 이성강 감독이 준비 중인 신작 <몽실이>(가제)와 <천년여우, 여우비> 역시 눈을 뗄 수 없는 프로젝트다. 호평을 받고도 시장에서 참패한 경험이 있는 감독과 제작사가 지난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좀더 시장친화적으로 발전한 작품을 선보이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천년여우, 여우비>를 준비 중인 이성강 감독은 “다만 몇편이라도 계속 만들어진다는 점에서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가 여전히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며 가슴을 열어 보인다. 얼어붙은 시장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메이저 제작사가 뛰어들고, 새로운 작품들이 빠르게 제작에 기치를 가하고 있는 2005년이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을까. 어쨌거나 7전8기를 거듭하며 땅속에 고개를 파묻었던 희망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불타는 연대기

엎어지고 일어서고, 38년의 우여곡절

1967년/ 한국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인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과 외전 <호피와 차돌바위> 개봉. 당시 한국영화 평균제작비의 10배에 달하는 5400만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선녹음·후작화 방식의 풀애니메이션(작화 수 12만5천장)임. 한국 최초의 인형애니메이션 <흥부와 놀부> 만들어짐.

1967∼75년/ <손오공>(1968), <황금철인>(1968), <보물섬>(1969), <왕자호동과 낙랑공주>(1971) 등이 연이어 개봉했으나 TV 보급률의 상승으로 해외 애니메이션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극장 애니메이션은 침체됨. 1974년부터 대원동화가 일본 도에이 동화의 하청작업 시작.

1976년/ 김청기 감독의 <로버트 태권V> 개봉. 76년 흥행 2위를 기록하며 대성공.

1977∼85년/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양적인 급성장기. 김청기 감독의 태권V 시리즈 외에도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1977), <똘이장군>(1978), <별나라 삼총사>(1979) 등 방학용 장편애니메이션이 쏟아져 나옴. 그러나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을 가져오지 못해 85년을 기점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시장 다시 침체. 87년 <떠돌이 까치>를 기점으로 TV애니메이션의 성장기가 시작됨.

1994년/ 한국 최초의 성인용 애니메이션 <블루 시걸> 개봉. 전국 50여만명의 흥행성적을 기록했으나 너절한 완성도로 애니메이션 산업 전반에 악영향 끼침(그러나 ‘서울시 수도 600년 기념’으로 타임캡슐에 들어감).

1995년/ 제1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개최. 일본 제작진이 대거 참여한 <돌아온 영웅 홍길동>이 전국 40만명 기록.

1996년/ 대규모 제작위원회를 꾸려서 만든 <아마겟돈> 개봉. 비평과 흥행 면에서 재난. 96년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한국영화 흥행 4위 기록.

1997∼99년/ <난중일기> <임꺽정> <또또와 유령친구들> <해상왕 장보고> <성춘향전> 등이 개봉했으나 뚜렷한 성과 남기지 못함. 80억원 규모의 <아크>, 45억원 규모의 <엘리시움>,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김문생 감독의 <원더풀 데이즈>가 기획에 들어감.

2002년/ 이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 개봉. 흥행성적은 미비했으나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새로운 바람 불러일으킴. 그해 프랑스 안시영화제 대상 수상.

2003년/ 거대 자본의 <엘리시움>과 <원더풀 데이즈>가 극장에서 참패. 성백엽 감독의 <오세암> 개봉. 비평적인 환대받았으나 독점적 배급관행으로 인한 파행상영으로 흥행에서 성과 거두지 못함.

2004년/ <오세암> 프랑스 안시영화제 대상 수상. <날으는 돼지: 해적 마테오> <신암행어사> <망치> 등이 개봉했으나 저조한 흥행성적 기록.

2005년/ <그리스 로마 신화 올림포스 가디언: 기간테스 대역습> <왕후심청> 개봉. 충무로 메이저 제작사 MK픽쳐스(<마당을 나온 암탉>)와 싸이더스(<럭키 서울>)가 장편애니메이션 제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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