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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사운드 오브 매직
김혜리 2005-08-19

웬일인지 한달째 목소리가 들락날락한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면 중간중간 음절들이 목구멍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내 귀 안에서만 공명한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군데군데 이빠진 묵음들을 미루어 짐작하면서 듣는 셈이다. 냉방병일까, 말하기가 부끄러워 생긴 증세일까 갸웃거리다가 <여고괴담4: 목소리>를 봤다. 바로 이거야! 영화 주인공처럼 실제로 나는 이미 죽었고 착한 가족과 동료의 기억 덕택에 산 사람 흉내를 내왔지만 마침내 사람들의 기억이 희미해진 거군. 이 새로운 가설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듣는 둥 마는 둥이어서 내 심증은 굳어졌다.

어쨌거나 <여고괴담4: 목소리>가 보여준 아이디어는, 영화의 소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누구나 “영화 보러 간다”고 말하지 “영화 들으러 간다”고 말하지 않지만, 영화 관람은 청각적으로도 대단히 특별한 체험이다. 누군가에 의해 ‘디자인’된 소리가 공들여 층을 쌓고 사방팔방에서 귀를 자극하는 사태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멀리서 쿵쿵거리는 공룡의 발소리가 없었다면 <쥬라기 공원>은 절반도 무섭지 않았을 터다. 원래 여름은 반쯤 귀가 먼 듯한 영화들이 번성하는 계절인데 우연인지 올 여름에는 소리가 솔깃한 영화들이 꼬리를 물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는 실재하지 않는 소리의 뛰어난 발명가 벤 버트(음향, 편집 담당)의 기량을 확인시켜 주었고, <우주전쟁>이 들려준 정체미상의 금속성과 정적의 조합은 교활한 협박이었다.

소리를 통해 돌아보는 영화의 면면은 나의 뒷모습처럼 새삼스럽다. 먼저 침묵. 영화의 침묵은 태생부터 별나다. 영화는 유성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침묵이라는 것을 가까스로 얻었다. 영화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다. 무음을 만들기 위해서 음향스탭들은 거대한 방 여러 개에서 소리를 채집한다고 한다. 침묵도 그것이 사막이냐 바다 속이냐에 따라 밀도와 무게가 다르고 그 차이는 다른 음향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이해된다. 화면의 암전은 쉽게 극중 암흑으로 해석되지만, 영화 사운드가 아예 꺼진다면 관객은 아마 대뜸 몰입을 중단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둘째, 영화 음향에도 물론 ‘그렇다 치고’식의 관습이 있다. 프랑스 파리가 배경이면 반드시 아코디언 소리가 저만치 깔린다거나, 칼만 등장하면 설령 칼집이 가죽이라 해도 챙하는 금속 마찰음이 난다거나, 고요는 언제나 벌레 한 마리의 움직임이나 낙숫물 한 방울로 강조된다거나 하는 등등 따져보면 놀림감이 많다. 셋째, 소리도 이야기를 전한다. 마니아들에 따르면 세심한 감독과 음향효과 기술자는 창문 여는 소리 한 가지만으로도 창틀의 재질과 집이 자리한 환경, 심지어 창문을 여는 사람의 마음까지 암시하는 신호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오죽 소모적인 작업이면 시드니 루멧 감독이 “신은 감독에게 매일 아침 소피아 로렌(정확하지 않지만)을 볼 수 있는 축복과 더불어 믹싱이라는 형벌을 주셨다”고 썼을까. 사운드디자이너에게는 거의 눈 같은 귀가 필요할 것이다. 소리풍경(soundscape)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각 시대의 소음이 이루는 장(場)은 다르다. 50년 전 사운드디자이너는 대형 쇼핑몰의 웅웅거리는 소리풍경을 재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오래도록 귓전에 맴도는 영화의 소리는, 시각을 시중들기를 잠시 멈추고 독주악기가 되어 감정과 운명을 표현하던 사운드들이다. <지옥의 묵시록>의 도입부 윌라드 대위의 호텔방에서 들려오던 영문 모를 정글의 소음이 그랬고, <캅랜드>에서 한쪽 귀가 먼 경찰의 점점 끓어오르는 갈등을 그가 듣는 세계로 묘사한 주관적 사운드가 그랬다.

밤낮이 바뀐 냉방된 사무실 밖에서 계절은 둔중하게 스쳐간다. 여름의 끝도 저 매미 소리가 그쳤을 때에야 알아차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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