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의 아버지가 아랑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1999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사실 그분은 한때 국회의원을 지낸 거물급 사업가로,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였던 필립 때문에 몇번 뵙기는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신분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분이 난데없는 부탁을 해왔다. 필립이 여행을 가는데 같이 가줄 수 없겠냐는 것이다. 아랑과 필립은 고등학교 때야 건들거리며 노느라고 어울리긴 했지만, 졸업 후에는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지내왔다. 둘 다 변변한 대학에 들어갈 재주는 없었지만, 서로의 처지는 전혀 딴판이었다. 돈도 ‘빽’도 없는 아랑이 남은 불알 두쪽으로 군대에 갔고, 필립은 든든한 아버지 덕분에 미국으로 도피 유학을 가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없는 형편에 새 천년 동해 일출 구경이라니. 아랑은 그저 횡재거니 하고 필립의 집으로 찾아갔다. 필립과 아버지는 벌써 문 앞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몇살이에요. 제발 좀 그만 하세요.” 노랑머리로 염색한 필립이 아버지에게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아버지는 대꾸도 않고 아랑을 반겼다. “그래 잘 왔네. 이놈이 몇년 만에 와서도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 뭐야. 동해에 해돋이 보러 간다니 말리지는 못하겠지만, 행여 나쁜 녀석들하고 어울리지 못하게 자네가 꼭 좀 붙어 있게.” 아랑은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필립의 아버지가 자기만은 ‘순박한 놈’으로 믿어주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네, 네” 하며 아랑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자니, 필립이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만 가. 노인네 말 그만 듣고.” 그리고 필립은 뒷좌석에 들어가 턱하고 걸터앉았다. 아랑이 뭔가 어색해하고 있자, 창 밖으로 한마디 내던졌다. “뭐해! 빨리 운전 안 하고?”
아랑은 옛 친구의 일일 운전기사가 된 자기 신세를 깨닫고, 그저 묵묵히 운전만 했다. 필립이 시키는 대로 호텔로 가서 그의 혼혈 애인 마르주를 태우고 동해 고속도로로 나갔다. 신나게 달리면 마음이 개운해지겠거니 했지만, 차는 온통 막혀 빠질 줄을 몰랐다. 필립은 뭐라고 미국말로 계속 욕을 해댔고, 그중에 얼마는 자기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랑은 알고 있었다. 아랑은 주변을 채우고 있는 자동차들이 모두 흐르지 못해 썩고 있는 강물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더러운 쓰레기더미는 이 멋진 외제차에 실려 있고.
얼마 후 차는 완전히 멈춰 서 십여분 동안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필립이 참다 못했는지 소리 질렀다. “이런 제기랄, 하여튼 이 한국이란 데는 거지 새끼들밖에 없어. 뭣 좀 볼 게 있다면 모조리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니….”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조금 낮은 목소리로 아랑에게 이야기했다. “야, 차에 왜 가스 냄새가 나? 나가서 보닛 좀 열어봐라.” 아랑은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뭐, 별 냄새 안 나는데.” 필립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야, 나가보라면 나가봐. 내 여자 친구가 머리 아프다잖아.” 아니꼬워진 아랑은 바람이나 쐬자며 나가서 자동차 보닛을 열었다. 그런데 무심결에 차 안을 보니, 필립 녀석이 마르주의 옷을 벗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마르주는 웃으며 아랑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몇 시간 후 차가 좀 뚫려 자동차는 동해 가까이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르주가 갑자기 아랑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깐 스톱, 스톱.” 고개를 돌려보니 서투른 우리말로 “나 오줌 마려. 터지겠어”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필립이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야 천박하게 그게 무슨 말투야?” 마르주는 “뭐 천박?”하며 필립을 흘겨봤다. “내가 말했잖아. 여자는 얌전해야 된다고. 그래서 양년들 놔두고, 우리 피 섞인 너를 데리고 온 거 아냐?” “그래 너는 백퍼센트 한국 피라서 그렇게 점잖냐?”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하며 필립은 마르주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놔, 놔!” 반항하는 마르주의 소리를 들으며, 아랑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익, 자동차가 서는 바람에 필립은 앞 좌석에 머리를 부닥쳤고, 그 틈을 타서 마르주는 차에서 뛰쳐내렸다. 필립은 차 밖으로 마르주의 핸드백을 던지곤 문을 닫아버렸다. “야, 그냥 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