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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작가열전] 추악한 얼굴의 천사, 레이먼드 챈들러
심산 2000-01-11

불륜의 격정에 사로잡힌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그녀의 남편을 살해한다. 그러나 일단 살인이 실행되고나자 스토리는 전혀 예측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남자는 격정과 의혹 사이의 좁은 길로 나 있는 미로에 빠져 허우적댄다. 저 여자는 혹시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나를 유혹한 것이 아니었을까? 익숙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플롯이다. 만약 <블랙잭>을 떠올렸다면 당신의 한국영화 사랑은 감동적이다. <보디히트>? 정답들 중 하나일 뿐이다. 충분치 않다. 이 플롯의 원형은 <이중배상>과 <빅 슬립>이다. 그렇다면 <이중배상>과 <빅 슬립>의 공통점은? 두 영화 모두 레이먼드 챈들러의 손끝 아니 머릿속에서 나왔다.

바바리코트깃을 세우고 줄담배를 피우며 나직한 쉰 목소리로 짧게 말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세상에 닳고 닳은 인간이고, 사랑을 믿지 않는 냉소적인 남자이며, 돈을 받아야만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설탐정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어쩔 수 없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하다. 험프리 보가트? 딩동댕! 그렇다면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낸 사람은? 다시 레이먼드 챈들러이다.

챈들러는 미국 시카고 출생이지만 유년기와 청년기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다. 영국의 덜위치대학을 졸업하고나서 한동안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그가 미국으로 돌아와 안착한 것은 1차대전에 참전한 다음이다. 평범한 사업가로 살아가던 그가 주로 어두운 범죄세계를 다룬 단편소설들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40대 중반에 접어든 1930년대 초반이다. 그의 작품세계를 특징짓는 것은 건조하고 빠른 템포의 대사와 팜므파탈에 의해서 복잡하게 뒤틀려 있는 암울한 플롯. 챈들러의 장편데뷔작이자 출세작인 <빅 슬립>은 이러한 하드보일드 누아르스타일의 한 정점으로 꼽힌다.

코넌 도일에게 셜록 홈스가 있고 애거사 크리스티에게 에르큘 포아로가 있다면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는 필립 말로이가 있다. 그러나 홈스와 포아로가 사변적이되 긍정적인 캐릭터라면, 말로이는 행동적이되 우울한 캐릭터이다. 그는 삶의 피곤함을 시시각각 느끼는 중년남자이며 세상을 밝게 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페시미스트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는 현대 범죄 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반영웅’의 원형 같은 존재이다(저 유명한 <차이나타운>의 제이크 기츠도 필립 말로이의 한 변주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말로이라는 반영웅이 내뿜는 서글픈 매력은 대단한 흡인력을 가진 것이어서 딕 포웰, 엘리엇 굴드, 로버트 미첨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이 배역에 도전해왔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대로 그 누구도 험프리 보가트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소설가로서의 챈들러는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그는 그다지 행복한 필모그래피를 갖지 못했다.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물론 그의 할리우드 데뷔작이자 필름누아르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이중배상>. 그 외에는 유일한 오리지널 시나리오인 <블루 달리아> 정도가 손꼽힐 뿐 여타의 작품들은 대체로 범작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 중평이다. 심지어 최후의 시나리오인 <기차의 이방인>에서는 히치콕에 의하여 거의 대부분의 신들을 수정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빅 슬립>

반면 그의 소설들은 대부분 영화화돼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기까지 했다. 그가 왜 흥행될 것임에 분명한 자신의 소설들의 각색을 한사코 마다했는지는 미스터리에 속한다. 아마도 자신의 소설들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오리지널리티를 ‘보호’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에피소드 한 가지. 영화 <빅 슬립>(1946)의 시나리오는 윌리엄 포크너가 썼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날리는’ 소설가였던 그는 그러나 불행히도 챈들러의 그 미로처럼 뒤엉키고 뒤틀려 있는 플롯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그는 챈들러에게 편지를 썼다. “도대체 스턴우드의 운전사를 살해한 사람은 누구죠?” 챈들러는 비아냥거리는 어조의 짧은 답신을 되돌려보냈다. “나도 모르겠소.”

챈들러의 말년은 마치 그가 창조해낸 세계의 음영이라도 드리운듯 어두웠다. 소문난 독설가요 폭주가였던 그는 평생의 반려였던 아내 시시가 세상을 떠나자 걷잡을 수 없는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으로 치달았다. 현대 영화에 끼친 챈들러의 영향력은 오히려 그의 사후에 더욱 확고한 것이 된 듯하다. 숱한 작가들이 그의 목소리를 흉내냈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영화들이 그의 플롯을 빌려왔다. 범죄에 찌든 LA의 뒷골목을 거니는 추악한 얼굴의 천사…. 레이먼드 챈들러는 착한 사람도 아니고 따뜻한 남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하드보일드 필름누아르의 아버지’로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심지어 마틴 스콜세지조차 <비열한 거리>(1973)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남긴 단 한줄의 문장에서 나온 영화라고 고백했을 정도이다. “남자라면 이 비열한 거리를 통과하여 걸어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살인이라는 단순한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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