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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석의 씨네콜라주] 태양은 아득히(하)

여자 친구인 마르쥬를 자동차에서 쫓아내버린 필립은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아랑은 오히려 그편이 잘 되었다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이젠 아무 것도 신경쓸 필요도 없이 그냥 달리자. 그리고 푸른 바다 위로 떠오를 새로운 태양을 가슴에 안고, 저 추접스러운 녀석과는 영원히 바이바이 해버리자. 그런 아랑의 마음을 담은 자동차는 달리고 달려 동해안에 닿았다. 뿌옇게 밝아오는 백사장에는 드문드문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크크크큭, 드디어 도착했군.” 뒷자리에서 뒤틀린 필립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말이야. 이건 뭔가 아닌 것 같아.” “뭐야? 제 시간에 도착한 것만도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대꾸하던 아랑은 역겨운 입김이 귀밑으로 스며들어오는 걸 느꼈다. “아니야. 내가 원했던 것은 말야. 새 천년의 첫 태양을 보면서 첫 번째 섹스를 하는 거야. 그런데 이게 뭐냔 말이야. 네 녀석 때문에 계집년을 놓쳐버렸잖아.” 아랑은 벌컥 화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야? 네가 때려서 쫓아낸 거잖아.” “크크큭, 모를 줄 알아? 그년이 계속 너한테 추파를 던지고 있었던 거 말야.” “야 임마, 억지 좀 부리지 마!” 아랑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필립은 꿈쩍도 없이 아랑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하하하, 내가 고등학교 때 왜 너를 데리고 다녔는지 알아? 그 단순함 때문이지. 그 단순함이 나를 흥분시킨단 말야. 그래, 너라도 괜찮아.” 필립이 아랑의 목덜미 속으로 뜨거운 손을 집어넣자, 아랑은 필립의 얼굴을 힘껏 뒤로 제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던져, 필립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으으윽, 이러지마. 장난이야.” 그러나 아랑은 필립이 더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으으, 살려줘. 돈을 줄게. 얼마든지 있어.” 그때 필립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리고 살짝 손의 힘을 뺐다. “네놈 현금카드의 비밀번호가 뭐야?” “으, 그래, 현금 카드를 줄게. 마음껏 뽑아 써. 4497” 아랑은 다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십여분 후, 아랑은 자동차를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터덜터덜 해변가로 걸어왔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 모여 새로운 태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하얀 여신이 아랑에게로 걸어나왔다. 마르쥬였다. “안녕? 너의 거지 같은 주인은 어떡하고 혼자야?” 아랑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주인이라고? 그래 몇분전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새로운 태양은 내 거야. 녀석은 지난 세기의 황제일 뿐이지.” “그래? 그럼 당연히 나도 네 거겠네. 새로운 태양의 주인님.” 마르쥬의 팔이 아랑의 외투 깃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아랑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르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옛 황제에게서 세계를 통치할 열쇠는 받아왔겠지. 그래 반짝이는 그것 말야. 나는 말이야. 이렇게 추운 데서는 십 분도 더 못 서 있겠어. 어디 호텔이라도 가자구.” 아랑은 마르쥬를 떼어내며 자신만만하게 쳐다보았다. “그래, 잠깐 기다려. 돈을 찾아 올테니.” 아랑은 뒤돌아 걸어가면서 안주머니에 챙긴 필립의 지갑을 만져보았다. “그래, 녀석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 거야. 녀석의 신분증을 위조하고, 녀석의 사인도 연습하고, 완전히 녀석인 것처럼 살아가는 거야. 녀석의 아버지가 끊임없이 통장에 돈을 넣어 줄테니 그것만으로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내일의 태양은 내가 즐기는 거야.”

아랑은 현금 인출기를 찾아 카드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카드가 들어가지 않았다. 왠일이지? 아뿔싸, 현금 인출기에는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Y2K 문제로 1월 3일까지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아랑은 화가 치솟아 카드기를 발로 걷어찼다. “뭐야, 이거. Y2K는 무슨 Y2K야? 그딴 문제는 없어. 빨리 돈 내놔.” 그때 아랑은 자기 뒤에서 낯익은 입김 냄새가 불어오는 것을 느껴 뒤돌아섰다. 이럴 수가. 필립이었다. “너… 너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글쎄, 네놈 덕에 지옥엘 갔는데 말야. 그곳 컴퓨터가 Y2K 오륜가 뭔가를 일으켜버렸지 뭐야. 그래서 사망 기록에서 지워져버렸고, 이렇게 돌아왔지 뭐야.” 그때 아랑의 등 뒤로 솟아오르던 태양도 다시 바다 밑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거대한 Y2K 오류였다.

등장인물

아랑: 미끈한 얼굴과 튼튼한 몸을 지녔지만 가난에 짓눌려 사는 가련한 젊은이. 고등학교 시절 외모 덕분에 아랑 들롱이라 불렸다.

필립: 부유한 집안의 망나니 아들. 어릴 때부터 자주 미국을 오고가 미국식 이름이 더 익숙하다.

마르주: 필립의 혼혈 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