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타이틀 시퀀스가 변신중이다.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에 국내 최초로 별도의 연출자를 기용하며 타이틀 시퀀스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할리우드 타이틀 디자이너 가슨 유가 만든 박감독의 신작 <친절한 금자씨>의 타이틀 시퀀스는 영화 자체만큼 화제를 모으고 있다. CG의 역할이 나날이 확대되는 한국영화의 제작환경을 고려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영화의 타이틀 시퀀스의 제작사는 어느 수준이며, 전문가는 몇명이나 있는지 궁금해진다.
아쉽게도 한국영화 타이틀 시퀀스는 아직 미완성의 영역이다. 현재 충무로에는 타이틀 시퀀스 전문 제작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타이틀 디자인만으로 밥벌이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보통 CG 스튜디오와 감독의 부수적인 작업으로 여겨지는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 타이틀 시퀀스에 공을 들이는 일은 영화제작의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조금이라도 길다고 느껴지면 제작자와 투자자들의 눈길은 어김없이 타이틀 시퀀스와 크레딧을 향한다”며 한 업계의 전문가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국영화 타이틀 시퀀스에 대한 논의는 잘 만든 영화가 한편 나오면 잠시 언급되다가 곧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21세기의 한국영화 중 사람들에게 다시 보여주고 싶은 타이틀 시퀀스를 감독, PD, CG 전문가인 10명의 영화인에게 물었다. 그들이 추천하는 한국영화 타이틀 시퀀스 베스트 10. 한국의 솔 바스와 카일 쿠퍼를 기대하는 당신이라면 다시 한번 이들의 DVD를 돌려보게 될 것이다.
복수심은 몸 위에서 스멀스멀 자라난다
<터미널> 타이틀 디자이너 가슨 유가 만든 <친절한 금자씨>(2005)
<친절한 금자씨>의 타이틀 시퀀스는 ‘금자씨’의 몸을 캔버스로 하여 그려진 유화이다. 맨몸이 주는 무심함에 그래픽의 날카로움이 입혀진다. 몸에서 자라나듯이 퍼져나가는 문양은 그녀의 내면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복수심을 암시한다. 붉은색 꽃을 떠받치는 나뭇가지나 잎사귀는 언뜻 보면 가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음속에는 비수를 감춘 채 교도소를 나서는 금자씨의 발걸음처럼. 붉은색을 포인트로 사용하고 무채색 계열을 명도와 채도를 조절해가며 배치한 <친절한 금자씨>의 타이틀 시퀀스는 영화 속 금자씨의 성격처럼 차가움을 극대화한다. 타이틀 시퀀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손바닥에 새겨지는 제목도 빨간 색조이지만, 기울어진 둥글둥글한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절제된 느낌을 전달한다. 이번 작품을 만든 타이틀 디자이너 가슨 유는 <헐크> <터미널> 등의 타이틀 시퀀스를 제작했다. 그는 ‘타이틀 시퀀스의 마술사’ 가일 쿠퍼와 예일대 동창이자 오랫동안 같이 작업한 동료로 알려졌다.
“팜므파탈의 이미지”
촬영이 시작되기 전 <친절한 금자씨>의 타이틀 시퀀스에 관한 스토리보드를 봤다. 미국에서 보내온 아이디어였는데 비주얼의 윤곽만으로도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실제 만들어진 타이틀 시퀀스는 고딕풍의 클래식함을 잘 살려낸 스타일을 보여준다. 여성적인 세밀함도 충실히 표현된 비주얼이다.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경계에 놓인 듯한 오프닝의 전체적인 느낌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와 닮아 있다. 내용 면에서도 본편과 별개로 독립된 오프닝만 봐도 금자씨가 복수하는 여자 혹은 팜므파탈의 이미지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수묵화로 그려낸 파라다이스
붓이 지나가면 해가 생기고 산이 생기는 <웰컴 투 동막골>(2005)
미색 한지 위로 먹물이 서서히 번지면서 영화사 크레딧이 떠오른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무기의 소음과 함께 시대 상황을 소개하는 자막이 그려진다. 자막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하다. ‘연합군 폭격기들은 숨어 있는 인민군 소탕을 위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그중에는 민간인 지역도 있었다.’ 자막이 끝나면 뒤로 물러서는 시점에서 절벽과 산골짜기 사이로 나비와 학이 날아다닌다. 수묵화의 붓놀림으로 해와 산이 화면에 너울거리며 중앙에 그려졌던 사각형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사각형이 사라진 곳에 제목 <웰컴 투 동막골>이 들어선다. 한국화풍인 <웰컴 투 동막골>의 타이틀 시퀀스는 VKR디자인의 정치열 감독이 만들었다. 정 감독은 “처음에는 로고 애니메이션 정도로 간단히 진행하려 했다. 좀더 작품의 판타지적이고 추상적인 면을 고민하다보니 현재의 한국화풍 이미지로 결정되었다”고 제작과정을 설명했다.
“한국화의 세련된 재해석”
이언희/ 영화감독·<…ing>
<웰컴 투 동막골>의 타이틀 시퀀스는 미색 한지 바탕에 붓글씨가 번지는 효과를 이용했다. 타이틀 시퀀스의 분위기가 주요 배경인 동막골이라는 공간과 영화에서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서정적이고 착한 감성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만든 이의 배려가 느껴진다. 크레딧은 전적으로 엔딩 부분에 배치하고 자막과 이미지만으로 간결하게 표현해서 영화의 본편과 오프닝이 따로 떨어져 있는 인상을 주지 않는 점도 긍정적이다. 한지와 붓글씨를 사용하는 표현방식을 사극이 아닌 영화에서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재해석했다는 점도 평가받을 만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