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를 볼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은 ‘참 동화 같다’는 것이다. <루루공주>도 아니고, 청춘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비교적 현실적인 감각으로 그려낸 <이별대세>가 동화 같다니, 내 생각에도 참 이상한 일이다. 아무래도 그놈의 ‘이별 계약서’ 때문인 것 같다. 연애는 쌍방의 ‘합의’를 필요로 하지만, 이별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바. 그러한 ‘연애 세계’에 이별 계약서를 내미는 그녀가 마치 동화 속 주인공처럼 낯설어 보인 게다.
‘책임져’류의 대사를 닭살로 여기는 시대인 만큼 최강희의 행동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쿨하게 이별하기’가 대세인 줄도 모르고, 촌스럽기 짝이 없는 ‘이별 계약서’란 것을 만들어 연애 선배들이 이루어놓은 합의사항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든다. ‘상대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서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간은 새로운 상대를 만날 때까지다’ 등등 현실적으로 도저히 합의하기 힘든 요구사항을 조목조목 적어 놓았다.
그런데 이 장면, 웬일인지 통쾌했다. 말도 안 되는 ‘이별 계약서’를 들고 와서 남자친구를 귀찮게 하는 그녀의 모습이 답답하면서도 한편 유쾌했다. 불합리한 쪽은 그녀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이별 계약(이별할 때에는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이 아닌지 돌아보게 된 것이다. 마음대로 시작했다가 마음대로 끝내는 일을 당연하다 못해 ‘쿨’한 행동으로 받아들이는 세상. 그러나 냉정하기로 따지자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직장만 해도 직원을 그만두게 할 땐 ‘퇴직금’이라는 것을 준다. 전형적인 계약관계도 이러한데, 남녀관계만은 왜 꼭 쿨해야 하나. 마음 정리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구가 부당한가? 오히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달라는 당연한 요구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나도 최강희가 꿈꾸는 세상과 실제 세상은 한참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헤어지자는 남자에게 이별 계약서를 내밀었다가는 구제불능 찰거머리로 낙인 찍힐 거다. 그래서 더욱 그녀의 이야기가 동화처럼 낯설고 동화처럼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모든 재미있는 동화가 그렇듯이 <이별대세> 역시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어린이가 주인공이다. 아, 물론 혼자라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혼자이나 그녀의 착한 심성을 알고 나면 누구라도 그녀의 편이 되어줄 테니까. 실장님이 나타나고, 할아버지가 나타나고, 든든한 지원세력인 가족도 버티고 있다. 앞으로 주인공이 이루고자 하는 일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일로 한 뼘 더 성장하리라는 점이다.
눈물 연기가 멋진 배우 최강희
이 드라마를 동화처럼 보게 한 또 다른 요인은 바로 ‘최강희’라는 배우다. 나는 그녀의 연기 중에서도 특히 눈물 연기를 좋아한다. 동그란 눈이 점점 더 동그래지다가, 그 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뚝하고 흘러내릴 때, 작게 흐느끼다 결국에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울어버릴 때,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말할 때. 그럴 때의 최강희는 아이처럼 맑고 선해 보인다.
영화 <와니와 준하>에서 최강희가 술에 취해 눈물 섞인 목소리로 하던 말, “너무 잘해주지 마요. 그러면 꼭 그만큼 뒤로 물러나더라구요.”를 기억한다. 드라마 <떨리는 가슴>에서 보여준 눈물 연기도 기억한다. 총에 맞은 시늉을 하며 장난처럼 찡그린 얼굴이 어느 순간 진짜가 되고, 진짜 ‘윽!’ 소리를 내며 울던 모습. ‘어린’ 어른을 위한 성장동화의 주인공으로 최강희 만한 배우가 또 있을까?
앞에서 퇴직금 운운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랑에는 애프터 서비스가 없다는 점이다. 사랑은 본래 불평등하고 비합리적이다. 그것이 현실 속 사랑의 모습이다. 그러나 불평등한 사랑과 이별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고쳐 보려는 시도마저 헛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방식이 현실에 맞지 않거나 설사 틀렸다고 해도, 그 시행착오조차도 이별을 견디는 매우 훌륭한 방법이었음을 그 과정을 다 겪고 나면 깨달을 수 있다. 또, 힘든 이별을 잘 견디고 난 뒤에는 훨씬 괜찮은 인간으로 변모한 자기자신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울보 최강희가 드라마 말미에는 씩씩하고 강한 어른으로 거듭나 있기를 기대해본다. 최강희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