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영화 열기가 한껏 뜨거웠던 1990년대 중반에 영화를 공부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질 들뢰즈의 <시네마>는 아스라한 동경의 대상 같은 것이었다. 당시 여기저기서 간간이 소개되던 그것은 막막한 영화이론의 돌파구를 열어줄 매혹적인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그것 자체에 제대로 다가갈 길은 별로 없었으니 한국에서 그 난해하고 복잡한 저작은 대체로 전모를 드러내지 않은 막연한 오해의 대상이요 신비로운 미지의 대상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시네마>로 본격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마련된 때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얼마 전에 <시네마2>가 마침내 번역·출간되었는가 하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네마>에 대한 꼼꼼하고 체계적인 해설서인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가 출판되었으니 이제 <시네마>의 실체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이제 <질 들뢰즈의…>로 들어가보면, 저자인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은 새로운 영화이론의 수립은 들뢰즈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며, <시네마>에 대해 우리가 흔히 갖기 쉬운 오해를 바로잡아준다. 저자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두권으로 구성된 들뢰즈의 <시네마>는 그간 들뢰즈가 발표한 철학적 저서의 요약, “영화를 경유해서 논리적으로 발전한 철학적 결과”로 이해한다. 그렇게 보자면, <시네마>는 들뢰즈라는 ‘시간의 철학자’가 심층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구성한 ‘시간의 철학’을 개진하는 책이 된다. 로도윅은 그 같은 전제 아래에서 <시네마>의 몇몇 논점들과 개념들이 들뢰즈의 철학적 프로젝트 안에서 어떤 식으로 일관성을 갖는가를 차근차근 요령있게 논증해낸다. 그러면서 기존의 철학과 문화정치학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들뢰즈의 저작이 어떻게 해서 비판의 힘과 저항의 힘을 갖는지를 밝혀내기에 이른다.
저자 스스로는 개론서라기보다는 철학서인 <질 들뢰즈의…>가 <시네마>를 설명하기보다는 자신이 <시네마>에 매혹된 이유를 설명하는 책이라고 했지만, 분명히 설명의 힘을 갖고 있는 이 책이 현재 국내 형편에서는 <시네마>로 들어가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유용한 지도로서 소용될 공산이 클 듯하다. 그걸 알고 있었던지 역자는 단어에 민감함을 일러주는 용어해설과 본문의 이해를 도와주는 후주로 책의 부피를 더했다. 영화에서의 이념(Idea)을 다루는 들뢰즈의 강연녹취록 “창조행위란 무엇인가?”도 흥미로운 부록이다. 그래서 <질 들뢰즈의…>는, DVD로 비유해보자면, 본편은 수준급이고 서플먼트도 풍부한 그런 타이틀과도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