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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의 악몽을 기억한다면, 호카조노 마사야의 <이머징>

도심 한복판에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걸어간다. 단순한 비대남으로 보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온몸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있는 남자는 계속해서 식은땀을 흘리며 기침을 해댄다. 감기라도 걸린 걸까? 그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고, 주변에는 그와 함께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돌연 남자는 두눈, 두 콧구멍, 입… 신체의 모든 구멍으로 피를 스프링클러처럼 뿌려대며 쓰러진다. 주변 사람들도 비명을 지르며 피범벅이 된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지금껏 인류에게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바이러스가 화려한 길거리 홍보 행사를 벌이고 있다.

10년 혹은 20년 전만 해도 만화와 영화는 현실의 대재앙을 충분히 앞서갔다. 사람들은 ‘정말로 미래에는 이런 일도 벌어질지 몰라’ 하며 오싹한 불안감을 야릇한 안도감으로 누르며 책장을 덮고 극장을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9·11 테러와 쓰나미와 같은 대재앙이 위성TV와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시대. 게다가 그 파괴의 범위와 사망자 수도 픽션의 수준을 가볍게 넘어버리기까지 한다. 현실과 픽션이 서로 앞서거니뒤서거니 재앙의 공포를 줄다리기하는 시대. <견신>의 작가 호카조노 마사야가 2004년에 선보인 바이러스 스릴러 <이머징>은 사스(SARS)의 악령이 동아시아를 뒤흔든 직후,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공포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만화의 전반에 그려지는 병원균의 전파장면은 ‘알면서도 꼼짝 못하는’ 전율을 만들어낸다. 차라리 프레데터나 에일리언처럼 눈에 잡히는 실체라도 있으면 몰라. 가벼운 접촉이나 공기 중의 호흡으로도 옮아갈 수 있는 병원균을 막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최초의 숙주와 접촉한 감염자들을 격리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단 한 사람에 의해 병은 전국으로 또 외국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갈 수 있다. 오직 절멸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견신>에서 이미 서스펜스의 묘사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호카조노이고, 바이러스라는 소재의 현실성이 가져다줄 파괴력에 대한 기대도 클 수밖에 없다. 인간적인 오노데라, 천재파인 세키구치, 바이러스와 사랑에 빠진 모리 등 세명의 연구자를 중심으로 한 캐릭터의 편대도 입체적으로 보인다. 솔직히 허무하게 해결책을 찾고 서둘러 끝을 내려버린 느낌이 적지 않지만, 초반의 압도감은 충분히 즐길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