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도 운명이란 게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기자로 일하다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못 버티는 글이 있는가 하면 수십년이 지나도록 읽히는 글이 있다. 주간지라면 그 생명은 대체로 일주일일 것이고 월간지라면 한달이 평균 수명일 것이다. 그렇다고 일간지보다 주간지가, 주간지보다 월간지가, 월간지보다 단행본이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각자 주어진 생명에 걸맞은 삶이 있다. 단 하루 살아남는 일간지 기사라 할지라도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보도처럼 고전소설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글도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주가 지나면 쓰레기통에 처박혀 영영 사라질 주간지라 해도 최선의 노력이 들어가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10년 넘는 역사를 만들어가면서 일주일 만에 잊혀지고 버려지기 아까운 글들이 <씨네21>에 적지 않게 쌓였다. 가끔 한주의 삶으로 만족 못할 글들이 “이대로 죽을 순 없다”고 아우성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씨네21>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이 실리는 잡지라고 믿기에 더 그럴 것이다.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어떤 글이 실릴까 기다려지는 칼럼들이 대표적인 예이지만 몇년간 <씨네21>의 한구석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킨 ‘내 인생의 영화’도 빼놓을 수 없다. 분량이 긴 기사를 우선시하는 잡지 구성의 원칙 때문에 약간 변방에 위치한 코너였지만 ‘내 인생의 영화’가 모신 쟁쟁한 필자들은 저마다 영화와 나눈 첫사랑의 기억을 애절한 그리움에 젖은 문장으로 바꿔 보내주었다. 내부에 있던 기자 입장에서 말하자면 매주 필자를 찾느라 고생했지만 고생하면 한 만큼 보람있던 일이 ‘내 인생의 영화’ 필자찾기였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감독(박찬욱·김기덕·김지운·류승완·김동원 등), 소설가(신경숙·공지영·한강 등), 드라마작가(노희경·인정옥 등), 배우(방은진·서정·오지혜·추상미), 아나운서(손석희·최영아) 등 여러 분야에서 정말 한번 읽고 버릴 수 없는 글을 차례로 만날 수 있었다.
<씨네21>이 첫 번째 단행본으로 <내 인생의 영화>를 내놓는다. ‘내 인생의 영화’ 코너에 등장했던 필자 가운데 골라낸 50명의 글이 묶인 책이다. 퍼뜩 ‘내 인생의 영화’를 책으로 묶어낸 것도 예정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건 일생에 한번 이상 쓰기 힘든 글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세상에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고백한 글, 그건 다시 쓴다고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은 아닌 것이다. 그런 글이 유통기한 일주일로 잊혀진다면 구천을 떠돌며 한을 품지 않을까.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혁신적 문체를 보여준다거나 하는 글은 아니지만 정말 솔직해야만 쓸 수 있는 글이 ‘내 인생의 영화’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영화친구 이훈을 사고로 잃은 박찬욱 감독의 고백. “그런데 왜 그대는 96년 그날 밤 신촌에서, 불이 나기로 돼 있던 롤링스톤즈 카페에 들어갔던 건가. 이만하면 박찬욱을 충분히 가르쳤다고 생각했는가, 그대는? 화장됨으로써 두번 불탄 이훈을 양수리 찬물에 띄워 보내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서 중년 사내의 피곤한 눈빛을 발견해야 했다. 이제 정신차릴 때가 되었다고, 그동안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한테 너무 오래 끌려다녔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순간부터 이미 우리에게는 페라라고 뭐고 안중에도 없었다.”
아마 <내 인생의 영화>에서 여러분은 가슴 찡한 성장드라마를 여러 편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면 한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내 인생의 영화>를 손에 쥐니 글에 어울리는 운명을 선사한 것 같아 뿌듯하다. 훌륭한 성장드라마처럼 오래 기억에 남는 글들이었기에 책이 되어 다시 태어난 것이 정말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