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의 단편집 『카스테라』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사람들의 ‘억울함’ 때문에 세워졌을 거라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러한 억울함이 피라미드의 불가사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억울함’, ‘복수심’과 같은 단어는 분명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우리 생의 추진력이 되는 긍정적인 효과도 함께 지닌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수는 훌륭한 삶의 의미가 되어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전래동화에서 누차 강조되어온 ‘권선징악’ 역시 ‘악에 대한 복수심’이라 할만하니,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복수’를 교육 받으며 자란, 복수와 꽤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다.
‘복수’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관심을 반영하듯,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복수 이야기가 있다. 요즘 한창 화제인 <친절한 금자씨>부터 <영웅본색>류의 홍콩영화, 최근 종영된 드라마 <그린로즈>까지. 서로 죽고 죽이는 무시무시한 복수도 있고,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일상 속의 복수도 있다. 이런 복수, 저런 복수. 드라마 속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복수다운 복수’를 다룬 드라마라면, MBC 베스트극장의 <늪>을 꼽고 싶다. 부인이 바람난 남편과 그의 애인에게 복수하는 내용인데, 그 복수 방식이 그야말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결정판이라고 할만하다. 남편을 성불구자로 만들고, 여자를 정신병원에 가두는 복수를 행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불륜행각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복수는 그를 성불구자로 만드는 일일 테고, ‘미친년’이라고 욕을 퍼붓고 싶은 여자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복수는 그녀를 ‘욕’이 아닌 ‘현실’ 속의 ‘미친년’으로 만드는 일일 게다. 이 모든 일을 머리채 한번 안 잡고 이루니 더욱 완벽하지 않은가.
<인어 아가씨>와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복수도 있다. 일명 ‘애인 뺏기 복수’. 사람 마음 얻는 일이 그리도 쉽더냐 따져 묻고 싶다가도, 늘 아무렇지도 않게 유혹에 성공한 뒤 의기양양해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맥이 풀려버리는 바로 그 복수. 하긴,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렇지도 않게’ 뺏는 것은 아니다. <인어 아가씨>의 주인공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드럼까지 배웠으니 그 노력이 대단하기는 하다. 남자를 유혹하려면 드럼도 배워야 하냐는 실소가 흘러 나오기는 했지만, 그녀의 주도 면밀한 모습에 감탄한 것도 사실이다. 그에 비하면 차무혁의 ‘애인 뺏기’는 어설픈 시도가 성공한 케이스다. 슈퍼맨의 뿔테 안경에 필적하는 어설픈 수염 변신. 그러나 차무혁의 진짜 복수는 ‘아들의 애인 뺏기’가 아니었다. 그는 부모보다 먼저 죽는, 더 징하고 더 슬픈 복수를 보여준다.
의도하지 않은 복수, 이를 테면 ‘생활 복수’를 다룬 드라마들도 많다. 원미경이 주연한 <아줌마>가 대표적이고, 최근 드라마로는 <두 번째 프로포즈>가 있다. 이 두 작품 모두 이혼한 여자의 성공을 그린다. 배신 당한 자의 성공기라고 할까. 배신자를 직접적으로 응징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주인공의 성공을 통해 시청자들의 복수심을 만족시킨다는 점에서 나는 이러한 드라마들도 넓은 의미의 ‘복수 드라마’라고 본다.
사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현명한 복수는 깨끗이 잊는 것이다. 깨끗이 잊고 열심히 살기. 그런 의미에서 ‘생활 복수’를 다룬 드라마들은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우는 긍정적인 측면이 꽤 있다. <늪>의 주인공은 남편을 성불구자로 만들고 그의 애인을 정신병원에 보내는 통쾌한 복수를 하고서 자살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데, 이러한 복수는 ‘생활 복수’ 차원에서 보자면 최악이다.
평범한 소시민의 삶 속에도 ‘복수의 순간’ 혹은 ‘복수의 칼날을 가는 순간’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억울함을 해소하고, 어떻게 복수해야 할까. 사무라이로 태어났다면 배신자를 죽이고 나도 죽는 것으로 복수를 완성하겠지만,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 죽고 죽이는 복수란 권하고 싶은 방법이 아니다. 현대의 복수는 오히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해야 한다. 법을 통해 복수하거나, 운명이 복수해주기를 기대하거나. 하지만 역시나 나부터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선의 복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