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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도 꿈을 꾼다, <디지털 삼인삼색-세계의 욕망>

“어머니는 언제나 말씀하셨지, 밝은 미래가 기다린다고, 착하게 지내다보면 기다리던 그날이 찾아와, 멋진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처럼 말야, 이룰 수 있을까? (후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인생, 좋은 길이든 나쁜 길이든 헤어지지 않을 거야,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행운이 나에게도 찾아올까? 우리 부모님처럼 그이가 나와 함께 있어줄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를 아껴줄까? 멋진 사람과 만나게 될 거라고, 우리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룰 수 있을까? (후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인생, 좋은 길이든 나쁜 길이든, 우린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야,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행운이 나에게 찾아올까? (후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인생, 좋은 길이든 나쁜 길이든, 우린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야,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행복이 정말 내게도 있는 걸까? 내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올까?”

세상에서 가장 긴 뮤직비디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이 노래를 정글 안에서 모두 들어야 한다. 이 노래를 저 멀리 한밤중의 정글에 조명을 설치한 무대 위에 여가수가 그녀의 백댄서와 코러스 걸들을 이끌고 걸어나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때 당신은 웃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노래는 이 정글과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걸 보여주는 영화는 조금도 그 노래에 매혹되거나 흥분한 것 같지 않다. 멀리서, 그저 무심코 그걸 찍고 있다. 그걸 앞으로 세번이나 더 보아야 한다. 마치 세번이나 반복되는 이 노래의 후렴처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계의 욕망>은 아마도 영화사상 가장 긴 뮤직비디오일 것이다. 이 영화는 슈가 팝발라드풍의 노래 <나에게 행운이 올까요>(에 관한) 뮤직비디오이다. 그냥 비유적으로 뮤직비디오라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렇다는 뜻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유치하고, 매우 따분하며, 뻔한 가사와 선율로 넘쳐나는 이 노래를 고스란히 다 들어야 한다. 그러나 서둘러 예상하면 안 된다. 맹세코 당신은 이런 뮤직비디오를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을 것이다. 혹은 (<빌리지 보이스>의) 데니스 림은 (위라세타쿤의 네 번째 영화) <열대병>을 더블 LP의 영화라고 불렀다. 그 말을 흉내내서 (그 네 번째에 이은 이 중편영화) <세계의 욕망>은 싱글 EP의 영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 영화의 제목이 ‘나에게 행운이 올까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세계의 욕망>이 아니라 <Worldly Desires>, 그러니까 “세속적인 욕망들”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을 잘못 알고 본 사람들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오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세계의 욕망>이 더 멋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 말이 ‘세속적인 욕망들’의 시적인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욕망들에 관한 뮤직비디오(를 빌린 이 영화)는 왜 세속적인 도시가 아니라 정글에서 진행되는 것일까?

정글의 세 가지 세속적 욕망

같은 말을 다시 한번 쓴다. 마치 세번이나 다시 시작하는 이 영화처럼 나는 다시 쓴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이 노래를 정글 안에서 모두 들어야 한다. 여기서 방점은 정글에 있다. 이 영화는 세속적인 욕망들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세속적 욕망들이 정글을 어슬렁거린다. 첫 번째는 물론 이 노래 <나에게 행운이 올까요>이다. 혹은 여기서 시작한다. 감상적인 팝발라드를 부르는 여가수와 그녀의 백댄서들과 코러스 걸들의 노래. 아마도 이 노래는 그주의 주말 히트 차트를 노리고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글에 그 노래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도 어두운 밤에 부르는 이 노래는 어딘지 모르게 이 정글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신기하게도 그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무언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이 노래와 정글 사이의 상호주관성의 환상과 같은 관계가 성립된다. 이 관계가 던지는 질문은 아이러니이다. 이 비현실성이 불러일으키는 환상은 여가수가 부르는 노래에 대해서 정글이 대상이 되어 떠오르는 것인가, 아니면 정글이 한밤중에 꿈을 꾸면서 떠오르는 대상으로서의 여가수인가? 세속적인 욕망이 그 대상으로 삼은 정글은 세속적인 대상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정글에서 노래를 부르겠는가? 그러나 정글은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글은 이미 거기 있는 대상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글은 원인없는 대상이다. 여기서 그 사라진 원인의 자리를 차지한 공백은 그 둘 사이의 중재를 요구한다(그러나 그것이 공백이 아니라 정글의 얼룩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그 중재에 두 번째 세속적 욕망이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그 가사를 따라 한밤중의 정글에 연인 커플이 유령처럼 등장한다. 물론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해서 두명의 남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걸 숨길 생각이 없다. 화면 바깥에서 레디, 액션을 외쳐대고, 그 연인들은 같은 액션을, 같은 동작을, 같은 상황을 몇번이고 다시 연기한다. 그 연인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노래의 가사밖에 없다. 사실상 그들은 노래 안에서, 노래를 위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의 등장인물이다. 이 연인들은 어디론가로부터 도망쳐왔다. 아마도 가사에 따르면 두 연인은 자신들의 결혼을 방해한 가족들에게서 도망쳐왔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루이, 그 남자의 이름은 차트리. 그들은 잠도 못 자고 도망쳐왔다. 루이는 차트리 오빠에게 도망치다가 힘없이 말한다. “이제 더이상 움직일 힘이 없어요, 오빠, 달 좀 보세요. 새벽 네시예요.” 그때 정글은 절망적인 장소이다. 여가수의 노래가 정글을 무대로 노래를 부르며, 아무리 소녀의 환상을 부추기더라도 정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저 무능력한 침묵. 여가수의 노래는 정글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저 절대적인 조건. 정글은 소녀 루이가 기다리는 “밝은 미래”가 아니며, 게다가 이 정글은 어두운 밤이다. 정글에는 “좋은 길도 나쁜 길”도 없다. 정글에서 소녀 루이와 그녀의 오빠 차트리는 결국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정글에는 길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짐승들을 위한 것이다. 만일 길을 찾고 싶다면 그들은 그 정글을 돌아다니는 동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지 않고서 정글에서 그녀는 아무리 간절하게 “내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올까요”라고 호소해도 그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정글은 그녀의 노래에 대한 유토피아가 아니며, 더더구나 상징적 공간이나 상상적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말 그대로의 정글이다. 세속적 욕망은 새벽 네시, 저 하늘에 달만 떠 있는 이 밤에 정글에서 길을 잃었다. 사실상 정글은 세속적 욕망의 방해자이며, 혹은 어쩌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세속적 욕망에 대해서 정글은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중이다.

정글의 밤이 즐거운 노래와 (이상하게 오래전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연인들의 슬픈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면 정글의 낮은 그 노래와 연인들의 이야기를 찍고 있는 한가로운 촬영팀을 보여주고 있다. 그냥 도식적으로 말하면, 정글의 밤이 노래와 드라마, 그 둘의 뮤직비디오이고 정글의 낮은 그것을 찍고 있는 제작현장이다. 하지만 위라세타쿤은 그 둘 사이를 그렇게 나누지 않았다. 이 영화는 뮤직비디오 제작현장에 관한 영화, 혹은 영화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는 뮤직비디오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며 만드는 쪽 입장에서의 자의식이 없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사실상 밤에 길을 잃은 루이와 차트리와 똑같다. 물론 처음에는 그 둘이 뮤직비디오의 안과 바깥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정글의 낮은 세 번째 세속적 욕망을 보여준다. 그들은 뮤직비디오를 찍으면서 스탭들끼리 대화를 나눈다. “제대하면 전기기사로 지원하지 그래요”라고 묻자 “전 경영학을 공부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한다. “전기기사가 돈을 잘 벌어요”라고 대답하자 “잘생긴 사람만 뽑더라고”라고 덧붙인다. 잡담은 영화를 찍는 중간에 다음 장면을 준비하면서 이어진다. 그래서 이 영화가 뮤직비디오 현장에서 진행되는 영화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이 낮의 현장은 밤의 뮤직비디오를 진행시키기 위한 다리와 같은 연결신(bridge scene)이 아니다. 차라리 밤이 노래와 드라마 사이를 번갈아 오가면서 보여지는 정글 속의 두개의 영화 속의 영화라면 낮은 노래와 드라마 바깥의 영화이다. 기계적으로 말한다면 낮은 현장이다.

정글의 시선, 그 마법같은 순간

그러나 어느 순간 현장은 정글이 된다. 이 말이 모순일까? 나는 여기에 이 영화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현장(이자 정글)이지만, 위라세타쿤은 마술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순간이다. 먼저 영화는 모니터 체크를 하는 스탭들의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기다림을 보여준다. 그때 여자는 호랑이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러자 남자가 “옷 좀 봐라, 본 지 한참 됐는데, 촬영할 땐 만날 호랑이 무늬만 입나보지?”라고 묻는다. 그러자 여자는 “미쳤어, 여러 벌 있어”라고 대꾸한다. 그러자 “잠깐, 띠랑 상관있는 거 아냐?”라고 묻자 “원숭이띠야, 호랑이띠와는 상극이지”라고 대답한다. “넌 무슨 띠인데?”라고 묻자 “원숭이띠”라고 말한다. “나무 자주 타지?”라고 묻자 “안 그래도 막 나무에 오르려고 그랬다”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촬영이 시작된다. 아마도 동시녹음인 것 같다. 스탭들은 조용히 현장을 지켜본다. 그때 정글 속의 나무 숲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지켜보던 남자 스탭 뒤에 호랑이가 나타난다. 보는 사람의 심장을 멈추게 할 만큼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 그러나 그 호랑이는 (그 뒤에 서 있는 여자 스탭의 바로 그) 티셔츠의 호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그 마술은 정글의 숲과, 그림자와, 침묵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외상 효과이다. 이제까지와 아무 다름없이 진행되는 낮의 현장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일순간의 침묵의 그 장면은 현장을 정글로 바꾸어놓는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던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만드는 이 찰나의 순간, 보(이지만 보지 못하)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이 시선의 얼룩이 불러일으키는 역전은 뮤직비디오로 정글을 찍던 것을 정글에서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으로 바꿔놓는다. 결정되지 않은 원근법, 이 이중의 장면. 거기서 정글은 눈속임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장면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정글은 그것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정글은 금세 모든 것을 원래대로 다시 돌려놓는다. 하지만 우리는 정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글이라는 시선의 비밀을 본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스탭들뿐이다.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거기서 그렇게 작업을 계속한다. 요술을 부리는 것은 정글이다.

(이 장면에 이어지는) 그들이 찍고 있는 내용은 다시 루이와 차트리의 이야기이다. 루이는 엄마의 말을 전한다. “잘은 몰라도 엄마가 북쪽으로 계속 가면 된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덧붙인다. 그 이야기는 숲속에서 한밤중에 하면 노여움을 살 거라고 한다. 누가? 정글이! 그 이야기는 “젊은 남녀 한쌍이 숲으로 도망쳤는데, 둘은 사랑하는 사이라 결혼을 다짐했지”. 이 말은 이상하다. 이것은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시 이들이 하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인가? 혹은 앞의 장면과 뒤의 장면은 순서를 바꿔서 촬영하는 중인가? 하지만 위라세타쿤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다시 (쵤영팀에 의해) 중단된 다음 이어진다. “엄마가 신기한 나무 얘길 해주셨어요, 연인들이 숲에서 길을 잃으면 항상 이 나무를 찾는대요, 우리 선조들도 이 나무에 소원을 빌었는데, 소원이 이루어지면 나무 아래에 보물을 얻었대요.” 사랑과 보물, 도망친 두 연인, 그들이 보물을 찾으면 밝은 미래를 얻을 수 있을까? 보물을 찾은 다음에도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을까? 그 뻔한 결말, 예고된 이야기, 이 영화의 제목. “세속적 욕망들”, 혹은 세속적 사랑. 그런데 연인들이 정글에서 길을 잃는 건 루이와 차트리의 사랑이 세속적 욕망에 떨어져 비극이 되는 것을 막고자 한 정글의 사려 깊은 염려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이야기가 끝나면 세 번째 <나에게 행운이 올까요>의 노래장면이 등장한다.

인간의 꿈, 정글이 꾸는 꿈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여기서 대(帶, zone)의 영화를 찍는다. 그가 다루려는 것은 정글을 내세워서 타이라는 지역적, 국가적, 민족적 영화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를 정글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그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든다. 그는 거기에 지명 붙이기를 원치 않는다. 정글은 모던한 것, 혹은 도시, 또는 장소에 대한 반대말이 아니다. 정글은 그 누구의 영토가 아니다. 그는 정글이 공간적으로 제로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제로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정글은 공간적이자 시간적으로 제로이다. 그러므로 제로이지만 여기에는 공간이자 시간의 서로 중첩된 주름이 있다. 그래서 나는 위라세타쿤이 만들어낸 ‘zone’을 지역이나 구역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지역대이자 시간대이다. 만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적 계보가 있다면 그 앞에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가 있다. 정글 안에 들어올 때 그 정글 안에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들어온 사람의 기억과 환상이 정글에 있는 것이다. 그때 정글은 그 자체로 하나의 꿈이다. 그러나 그 꿈은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이 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서 정글이 꿈꾸는 것이다. 정글에 들어왔을 때 그는 정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정글이 그보다 크기 때문에 그가 정글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정글 안에 들어왔을 때 그는 정말 정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가 정글에 들어왔을 때 그는 이미 정글-되기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욕망>은 팝발라드 <나에게 행운이 올까요>라는 노래의 정글-되기이다. 그 세속적인 노래가 정글 안에서 불릴 때 정글은 그 노래를 정글의 추억으로, 정글의 노래로, 정글이 여가수의 목소리를 빌려 부르는 노래로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안간힘을 쓴다.

이 영화는 그래서 낮에 (뮤직비디오로 찍을) 다음 밤장면을 기다리면서 낮와 밤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결국, 할 수 없지만, 위라세타쿤은 이제까지 밤과 낮으로 번갈아 진행되어온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 낮과 밤이 함께 있는 시간, 정글의 저녁을 보여준다. 그때 영화에는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목소리와 정글만이 보인다. 이제 곧 눈에 보이는 정글들의 낮의 풍경은 사라지고, 어둠이 내리면 숲속의 나무들이 그 풍경을 대신할 것이다. 위라세타쿤이 찾아낸 이 시간, 이제까지 둘로 나뉘어져 진행되어온 이 시간이 여기서 하나가 되고, 그 순간 영화는 거의 불가사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왜 아침이 아니고 밤인가? 이미 이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했다. 연인들의 드라마는 끝나선 안 되며, 노래는 영원히 불려야 한다.

정글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

<세계의 욕망>의 마지막 자막은 이렇다. “깊고 깊은 산골짜기에 그들의 지난 꿈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과 짐승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모든 나무에 깃든 지난 시간들을 위하여.” 그러면 이 영화의 제목이 떠오르고, 그리고 “정글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라는 말이 덧붙여진다. 위라세타쿤은 모든 나무에 지나간 시간들이 깃들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 지난 시간들, 지난 꿈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과 동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정글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세속적 욕망들을 가지고서도 자기의 지난 꿈을 축하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 능력은 세계의 한순간이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조화의 창조에 있다. 저녁의 그 순간, 세속적 욕망들의 활동은 멈춘다. 그리고 이 영화에 유일하게 반성적인 대사가 나온다. “풍경이 너무 황량한데, 너무 황량해.” 단 한번의 눈길 주기. 정글은 그것만으로도 축하할 수 있는 관대한 능력이 있다. 저녁은 찰나의 순간에 사라져갈 것이다. 그러나 위라세타쿤은 그 찰나의 순간을 마지막 순간에, 아직 밤이 오기 전에 영화를 끝내면서, 그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다. 그들은 정글 안에서 사람과 동물이 되어, 오늘밤, 어쩌면 지난 시간이 깃든 나무 아래서, 한자리에 모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들을 위해 정글은 그 노래, <나에게 행운이 올까요>를 불러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노래가 갑자기 다시 듣고 싶어졌다.

추신: 이 영화는 올해 전주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 중 하나로 쓰카모토 신야의 <혼몽>과 송일곤의 <마법사(들)>와과 한짝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세편의 영화는 서로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남은 두편의 영화에 관한 글은 다른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남은 두편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 글의 나머지를 다른 누군가가 채워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글은 여기까지이다. 미안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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