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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영화미학, <춘향뎐>

<춘향뎐>의 줄거리를 말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한국에서 중등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이야기, 불멸의 고전 <춘향전>을 영화로 만든다는 건 그래서 대단한 모험이다. 줄거리야 이미 뻔하고 게다다 수십번 영화로 TV드라마로 재탕돼온 이 오래된 이야기에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게 아직 남아 있기나 한 걸까. 임권택 감독은 조상현씨의 판소리 완창 ‘춘향가’를 듣고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어떤 좋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다.” 영화 만드는 일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라 그 느낌을 자기 안에 가둬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귀에서 판소리가 계속 윙윙거려 임 감독은 결국 영화 <춘향뎐>에 손을 댔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문제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었다. 판소리의 리듬과 감흥을 판소리 자체보다 훨씬 뜨겁게 살려내는 방식. 임 감독이 택한 길은 판소리와 영화의 경계를 없애는 것, 그래서 판소리의 효과를 끌어오는 게 아니라 영화 전체를 판소리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판소리 완창이 시나리오이면서 내레이션이고 음악이기도 한 영화. 등장인물의 동작 하나하나에도 판소리의 리듬이 스며든 영화. <춘향뎐>은 처음부터 서구의 전통적 영화문법을 넘어선 자리에 한국적 연행예술의 미학적 자재로 영화의 집을 지으려는 실험이다. 서구식 장르 개념을 빌려 말하자면, 판소리 뮤직비디오와 판소리 뮤지컬을 혼합하면서 그것을 동시에 넘어서려는 야심찬 시도다.

<춘향뎐>은 정동극장에서 열리는 조상현의 판소리 완창 ‘춘향가’ 공연을 담은 의사 기록필름에서 시작하고 끝맺는다. 판소리의 이야기를 재연한 드라마가 영화의 몸통이다. 정동극장의 공연장면은 드라마 중간에도 심심찮게 끼어든다. 이를테면 극중극 형식이지만, 두극의 관계는 좀더 복잡하다. 전통적 드라마가 비중이 높긴 하지만, 조상현씨의 판소리가 음악과 내레이션 역할을 겸하는 1시간 동안은 뮤직비디오 형식이고, 극중극 인물인 월매가 어사 출두 직후 직접 판소리를 할 때는 뮤지컬이다. 때로 춘향이 곤장을 맞을 때처럼 조상현의 판소리와 극중 인물의 대사가 중첩될 땐 두 가지 형식이 뒤섞인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구성이지만, 영화는 별로 혼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판소리의 리듬과 흥이 극을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판소리를 영상으로 보여주겠다는 임 감독의 시도는 빛나는 대목들을 낳는다. 춘향을 잡아들이란 변사또의 명을 받은 포졸 둘이 “양반서방 얻었다고 우리를 개똥 보듯 깔보더니 우리한테 잘 걸렸다. 잘 되고 잘 되었다”는 소리에 맞춰 달음질하듯 걸어가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압권이다. 춘향을 매질할 형리가 곤장다발에서 손에 착 달라붙는 곤장을 춤추듯 골라내는 대목도 잊혀지기 힘들다. 당대 사회상을 해학과 골계의 언어로 단숨에 꿰뚫는 고전의 문학적 힘과 유희정신 그리고 유려한 카메라워크가 빚어내는 영상의 정교한 리듬, 그 모든 것을 판소리의 흥으로 녹여내는 명장면들이다. 판소리는 <춘향뎐>의 심장이고 두뇌이며 손발이다. 하나씩 떼놓고선 설명할 수 없는 <춘향뎐>의 몸이다.

드라마만 놓고 봐도 새로운 점이 있다. 실제 춘향과 몽룡의 나이에 가깝다는 10대 주연인 이효정과 조승우는 춘향전 드라마 사상 가장 에로틱한 정사장면을 연기한다. 병풍 앞에서 수작을 벌이다가 병풍 뒤에서 옷을 벗어던지며 어둑한 조명 아래 알몸을 서로 맞추는 걸 보고 있노라면 얼마간 호흡조절을 해야 한다. 이건 임 감독의 소신이다. “정조 관념만으론 춘향의 절개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몸이 기억하는 사랑이야말로 춘향의 독한 저항의 뿌리다”. 변사또 앞에서 춘향이 늘어놓는 긴 사설이나 어사가 된 몽룡이 변학도에게 춘향의 절개를 “인간으로서의 저항”이라고 투박하게 해설해주는 대목에선 신분사회와 폭정에 대한 비난을 춘향의 저항에 심으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그러나 잘 꾸며진 드라마를 의도한 대목들이 <춘향뎐>의 흥을 멈칫거리게도 한다. 전통적인 드라마에 빠져들었다가 판소리의 유희로 금방 빠져나오긴 숨이 찬다. 정동극장의 판소리 공연에 청중들이 흥에 겨워하는 장면들도 정작 <춘향뎐> 관객의 흥은 얼마간 뺏아간다.

<춘향뎐>은 소리뿐만 아니라 영상으로도 남부럽지 않은 영화다. 많은 민속학자와 사학자들이 참여한 고증작업은 30억여원의 제작비에 힘입어 옥사에서부터 요리까지 당대의 생활상을 풍성하게 재현했고, 시골길과 마을 그리고 한국적 산수의 아름다움은 임권택-정일성의 오랜 파트너십이 빚어낸 수많은 영화 중에서도 최상급이다. 거칠고 화려하고 싱싱한 <춘향뎐>은 모든 면에서 너무나 한국적이다. 임권택 감독은 100여편에 이르는 영화 이력의 끝에서 한국적 영화미학이라는 미지의 영토를 발견하고 새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춘향전>의 이중성

양면의 거울, 양날의 칼

판소리 <춘향전>은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판소리가 계층을 초월한 오락이었기에 판소리의 대표작 <춘향전>은 모두에게 사랑받도록 다듬어질 팔자였다. <춘향전>은 이중성이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이다. 시인 김중식씨와 문학사연구회가 함께 쓴 <불멸의 춘향전>(1999, 청동거울)에는 실린 김수이씨의 평문 ‘<춘향뎐>에 나타난 가치관의 이중성’은, 줄거리는 누구나 알지만 진가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춘향전>의 복합적 성격을 밝히고 있다.

먼저 양반적 가치관과 상민적 가치관이 충돌한다. 춘향의 무기인 정절은 유교적인 가치관이지만, 기생의 딸이 고관대작의 정실 부인이 된다는 설정은 혁명적인 발상이라는 것. 게다가 춘향은 사또의 수청 거부라는 반역을 저지르면서 정절을 지킨다. 춘향과 몽룡이 자유연애를 통해 부모 허락없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도 당시로선 엄청난 파격이다. 언어도 이중적이다. 몽룡과 춘향의 말은 고상한 격식체인 반면, 월매와 방자의 말은 걸쭉한 서민 말투의 전형이다. 또한 우아미와 골계미, 비장미와 해학미 등 대립되는 미적 가치도 공존한다. 전체적으로 <춘향전>은 신분질서가 극심하게 흔들리는 혼란의 시대가 낳은 양면의 거울이며, 그 중심에는 봉건적 가치와 근대적 가치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춘향전>은 양면으로 열려 있으며 그 때문에 오늘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고 김수이씨는 결론짓는다.

영화 <춘향뎐>은 그 이중성을 자의적으로 정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건 가지런한 전통적 가치관을 동경하면서도 종잡기 힘든 인간 본성을 외면하지 못하는 임권택 감독의 작품세계 그 자체의 반영인 것처럼 보인다. <춘향뎐>은 여기에 드라마적 완결성과 연행예술적 개방성이 서로 대립하는 양면성까지 첨가한다. 여하튼 판소리 <춘향전>은 영화 <춘향뎐>에 이르러 더욱 복합적인 텍스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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