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친절한 금자씨> [6] - 달시 파켓 비평

아름답고 난해한 영화

한번의 관람으론 온전한 이해가 어려울지 모르는 아름답고 난해한 영화의 첫인상들, 다음과 같다.

내가 느끼기에 연출자로서 박찬욱 감독이 갖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능력 중 하나는 가속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점이다. <올드보이>는 도저히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일련의 사건들에 힘입어 앞을 향해 나아간다. 미도가 오대수를 설득해 그의 복수 의지를 꺾어놓으려는 시점에 이르러, 우리는 그가 왜 멈추지 않을 것인지 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동시에 속도를 늦춘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앞을 향해 달려가는 내러티브의 힘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만약 대수가 전진을 멈추게 되면 그는 뭉개지고야 말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템포는 한결 느리지만, 두 주인공을 앞으로 밀고나가는 힘은 마찬가지로 필연적이다.

물리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가속도는 질량에 속도를 곱한 값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영화들은 이야기를 펼쳐나감에 있어서 빠른 템포를 차용하고 있지만, 영화에 진정한 가속도를 부여할 만큼 충분한 무게의 내러티브를 자아내는 것은 별로 없다. <복수는 나의 것>은 느리게 진행되지만, 매우 무겁다. <올드보이>는 무거운 동시에 빠르다. <올드보이>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이유 중 큰 부분은 멈출 수 없는 기차에 올라탄 듯한 느낌에서 비롯되는 아드레날린의 분출 때문일 것이다. 반면 내가 <쓰리, 몬스터>의 <컷>에 실망한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영화가 정적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그 영화는 어디에도 전진하지 않았다.

<복수는 나의 것>의 템포가 라르고였다면, <올드보이>는 알레그로였고, <친절한 금자씨>는 모데라토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가속도는 전작의 수준에 결코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이전 작품들의 경우 모든 힘이 단일한 방향에 집중되어 있었던 데 반해, <친절한…>은 다소 배회한다. 금자에게는 복수를 하기에 앞서 신경써야 할 다른 일들이(딸을 찾아가는 것처럼) 있다. 이러한 면이 처음엔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영화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초창기 영화들 속 가속도는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에 인물에게는 자유의지가 전혀 없는 듯했다. 마치 그리스 신화처럼 주인공들의 행동과 궁극적 운명은 미리 정해진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금자는 자기 자신의 지향점을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전작에 등장했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극을 받고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지만, 우리는 그녀가 진정 원하기만 한다면 멈출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이런 것 때문에 영화 속 사건에 대한 매우 상이한 도덕적 배경이 형성되며, 우리는 그녀가 취하게 될 행동에 대해 그녀 스스로가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도덕적 문제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항상 등장했는데, 다소 배후에 가려진 면이 있었다. 하지만 <친절한…>에서는 도덕의 문제가 전면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영화의 진정한 플롯은 금자가 복수에 성공하느냐 여부가 아니라(왜냐하면 그녀의 솜씨나 기략으로 미루어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으니까), 그녀가 스스로 저지르겠다고 결심한 행동에 대한 구원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영화의 이러한 도덕적 관점 때문에 최민식이 연기한 백 선생이라는 인물은 매우 흥미로운 존재가 된다. 흥미로운 이유는 백 선생 캐릭터가 마치 한장의 마분지처럼 매우 얄팍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영화를 통해 박찬욱 감독은 ‘악’을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언제나 거부했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우리는 신하균이 연기한 류나 송강호가 연기한 동진이란 인물들이 저지른 끔직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두루 공감하게 된다. <올드보이>에서 유지태가 연기한 우진은 혐오스러운 동시에 동정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백 선생이야말로 순수한 악 그 자체이다.

갑자기 박찬욱 감독이 흑백논리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조지 부시와 같은 정치적 세계관을 갖게 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백 선생이 보여주는 얄팍한 캐릭터 덕분에 우리는 그를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닌 무언가에 대한 상징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만약 이 인물을 백 선생이 아닌 스탈린이라 칭한다면 어떨까? 이렇게 되면 백 선생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복수어린 행동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좀더 추상적인 느낌을 가지고 백 선생을 살인 자체에 대한 상징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프리츠 랑 감독의 <M>에서와 같이 악질의 범죄자에 대한 응징이 진정한 의미의 정서적 갈무리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복수 자체가 극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등장인물의 결정에 대해 영화는 좀더 모호한 입장을 나타낸다. 복수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영화는 대체로 크게 한방 날리면서 끝나고서 관객이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설 수 있게 해준다. 죄와 벌이라는 사안에 대해 좀더 진솔하게 접근하는 영화들은 마지막에 물음표를 던지곤 한다. 또는 <친절한…> 같은 경우, 기괴하면서 상징적이고 동시에 이상하게 아름다운 이미지를 남겨주기도 한다.

관련영화

번역 안호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