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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아이러니가 가득찬 세상, 변기현의 <로또 블루스>

노숙자가 맡긴 로또 복권으로 유혹에 빠진 목사, 식육용 인간을 사랑하게 된 젊은 도살꾼, 강의 시간에 자리를 비웠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린 강사…. 변기현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곤궁에 처해 있다. 만화의 배경은 다채롭지만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을 옥죄고, 단단한 데생의 사물들이 인물 주변을 압박하고, 꼼꼼한 컬러링은 화려하지만 무겁다. 광각을 즐겨 쓰는 주관적인 앵글이 이 모든 것을 화면 앞으로 끌어당기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무지막지한 압력을 만들어낸다.

변기현의 단편집 <로또 블루스>는 지난 몇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온 한 젊은 작가의 궤적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신인급의 단편집이기 때문에 작품들 사이의 편차가 상당히 존재하고, 아주 설익은 단편도 없지 않다. 뫼비우스, 마쓰모토 다이요, 오오토모 가스히로 등 여러 스타일리스트들로부터의 영향이 작품들을 산개시키는 느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처럼 광범위한 모색의 기운이 <로또 블루스> <비 내리는 4호선> 등의 근작에서 분명한 알맹이를 만들며 모아지고 있기에, 단편집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마음은 분명히 흡족함쪽으로 맞춰지리라 여겨진다.

‘다른 모든 사슴들’에게 린치당하다 산타에게 구출되는 루돌프, 가상세계의 소모품인 ‘요쿠르트 아줌마’를 사랑하게 된 센터 직원 등 변기현의 상상력이 빚어낸 존재들은 유머와 강박 사이를 오고간다. 작가 변기현을 만들어내는 두 가지 큰 장점은 ‘단단한 기본기에 바탕을 둔 충실한 리얼리티’와 ‘인생의 위태로움을 깨닫게 하는 기묘한 아이러니’다. 변기현의 작가적 가치가 돋보이는 것은 화려한 필력 이상으로 이런 스토리텔링의 능력에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물론 작품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 지나친 주제 의식, 과도한 시각적 표현의 욕구로 인해 독자들을 쉽게 질리게 만들 위험 역시 안고 있다. 이러한 무거움을 덜어내는 개그적인 장치 역시 없지는 않은데, 윤태호를 느끼게 하는 극화적인 표정 묘사와 다소 썰렁한 개그들이 아직은 충분한 공감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비 내리는 4호선>에서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는, 상황 자체의 아이러니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유머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최규석, 석정현, 그리고 변기현. 한국 만화를 기대하는 우리 눈의 초점을 당분간 ‘삼단변신’이라는 작업실에서 태어난 세 스펙트럼에 맞추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