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감독 폴 맥기건 출연 말콤 맥도웰 장르 액션 (콜럼비아)
유혈이 낭자한 권투 시합장. 몽환적인 화면 너머엔 권투를 관람하는 노년의 인사들이 내뿜는 시가연기가 자욱이 배어 있고, 이내 스며들기 시작한 핏빛 그림자는 그들을 덮어버린다. 영화 <갱스터 넘버 원>은 영국 60년대를 주름잡던 런던 동부지역 갱조직의 흥망성쇠를 다룬 작품. 야망과 출세욕에 자신의 영혼과 정열을 팔아버린 노년의 갱스터 ‘no. 55’의 회고담에 가까운 영화이다. 지금은 조직의 최고 보스가 되었지만 그는 한때 프레디 메이즈라는 냉혈한이 이끌던 조직의 끄나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타락한 야심은 상대세력을 이용해 프레디를 제거하고 결국 자신의 극단적인 폭력과 광기를 이용해 조직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된다.
간만에 만나게 되는 영국식 갱스터영화 <갱스터 넘버 원>은 가이 리치의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와 코믹함으로 치장된 <록스탁 앤 투스모킹 배럴즈>와는 또다른 스타일과 정서를 수반한 작품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60년대를 풍미했던 팝컬처의 비주얼한 이미지가 지배해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디지털적 감성의 파격적인 화면분할을 감행한다. 때문에 얀 쿠넹의 <도베르만>이 연상되는 지점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은, 영화의 중반쯤, 주인공인 no.55가 상대편 조직의 보스를 무표정하면서도 쾌락적으로 살육하는 부분에 이르러서이다. 여기서 no.55의 모습은 한편으론 <아메리칸 사이코>의 여피 살인마 패트릭과 닮아 있고 좀더 밀접하게는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의 알렉스와는 거의 동일인물처럼 보인다. 젊은 시절의 말콤 맥도웰이 폭력적인 일탈자 알렉스로 분해 부르주아 여인을 강간하고 살해하면서 섬뜩하게도 <싱잉 인더 레인>(Singing In the Rain)을 유쾌하게 부르던 냉혹한 폭력의 가상적 이미지 말이다. 때문에 <갱스터 넘버 원>에서 60을 훌쩍 넘긴 갱스터로 출연하는 말콤 맥도웰과 그의 젊은 시절을 연기하는 no.55(폴 베터니)는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의 폭력의 광기에 찬 알렉스와 소통하는 이미지이다. 한데 이러한 몇 장면을 빼고나면 이 영화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물론 과감한 비주얼의 매력은 뛰어나지만 전반적으로 영국 60년대 갱영화를 새롭게 연출하면서 전해지는 감독의 주제의식이나 사회성은 진부하다. 큐브릭이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에서 보여준 폭력과 광기의 파시즘, 그리고 심지어 얀 쿠넹의 <도베르만>에서 읽히는 90년대 이미지 세대의 정치적 냉소주의조차도 이 영화에선 표출되지 못한다. 단지 숨가쁘게 인생을 달려온 노년의 갱스터가 들려주는 자괴섞인 푸념만 남는다. 과감한 형식도발에 비해 다소 진부한 주제의식인 셈이다.
정지연/ 영화평론가 woodyalle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