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사랑과 결혼’ “순결을 잃었어” 2003년 ‘옥탑방 고양이’ “괜한 실수를”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 “한 번 자자”
“호텔이 거기 있어” 갔다. 현무가 먼저 “한 번 자자” 했지만, 이영이 잡아끌었고 “서비스 좋았다”며 10만원짜리 수표도 남겼다. 이불을 박차며 숙영이 “왜 이렇게 끙끙대, 짜증나게…” 하자, 수근은 “내, 내가 뭘…” 하며 민망스럽다. “그만해. 되지도 않는 걸, 힘만 빠지게….” 숙영이 ‘확인사살’한다. <내 이름은 김삼순>과 <유행가가 되리>의 장면이다.
방송 드라마가 다루는 ‘성’이 한참이나 달라졌다. 솔직과감해졌다. 소재나 표현뿐 아니라 다루는 태도도 그렇다. 암시하거나 슬그머니 넘어가는 방식이 아니다. 정면에서 마주본다. 성을 얘기할 때 으레 보이던 부담감도 많이 덜었다. 정색하지 않고 가볍게 그린다. 어깨에 힘을 뺐다. 하고 많은 일상 중 하나일 뿐이라는 식이다.
예전엔 어땠는데?
1995년 <사랑과 결혼>이 ‘혼전 성관계’를 다뤘다. 약혼자에게 ‘순결’을 바친 여성이 새로 나타난 남자 앞에서 갈등하는 줄거리였다. 그런데 방송위원회의 경고를 받았다. 비디오를 보던 여성이 남성의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을 살짝 빼는 장면 때문이었다. 성은 그 자체로 금기였다.
2000년 들어서 양상은 조금 달라진다. 2002년 <고백>과 2003년 <앞집 여자>는 부부의 성 문제를 다뤘다. <고백>이 진지하게 접근했다면, <앞집 여자>는 다소 가벼웠다. 코믹 터치 방식의 <앞집 여자>는 순항했지만, <고백>은 외설 논란 속에 정공법을 포기했다.
젊은이들의 성을 다루기로는 2003년 <옥탑방 고양이>가 대표적이다. ‘동거’가 일대 화두였다. 술에 취해 성관계를 갖는 젊은이들의 모습까지 나왔다. 같은해 <결혼이야기>나 <연인>도 동거를 다뤘다. ‘연상녀·연하남’의 연애담인 2004년 <천생연분>은 성을 표현했지만 암시적이었다.
지난해까지도 ‘성’은 주로 양념이나 소품의 구실이었거나, 조심스럽게 애둘러 스쳐지났다. 또는 완충제로서 코믹한 설정을 집어넣었다. 또 작심하고 성을 다루려는 시도는 사회적 저항에 쉽게 꺽였다. ‘동거’ 바람을 부른 <옥탑방 고양이> 조차도 성을 그리는 방식에 있어 매우 수줍었다. 변화라면, 95년의 ‘약혼녀’가 “순결을 잃었다”고 울부짖던 모습과 달리, ‘옥탑방 고양이’는 “괜한 실수를 했다”고 한숨짖는 정도였다.
2005년, 지금은…
2005년은 드라마의 성 표현과 수위, 방식이 변화한 해로 방송사에 기록될 만하다. 연인간의 혼전 성관계는 당연한 일인 듯 전제되고 ‘하룻밤 사랑’도 쉽게 표현된다. 미혼모도 줄줄이 등장했다. <원더풀 라이프>와 <온리유>는 하룻밤 사랑으로 생긴 아이가 이야기의 출발이고, <굳세어라 금순아>는 혼전 임신이 사건의 시작이다. <불량주부>에서도 결혼 전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여관 장면을 내보냈고, <쾌걸 춘향>은 몽룡과 춘향이 한 방에서 잤다는 것에서 드라마가 시작했다. <봄날>에서도 술에 취해 잠자리를 갖는 남녀의 모습이 나왔다. 요즘 방송되는 <변호사들>에서도 연인의 잠자리가 당연한 듯 묘사됐다. 10대부터 중년부부까지, 이들이 겪는 일상 속의 성을 조심스럽게 또는 과감하게 묘사하거나 암시하는 것이 올해 드라마의 커다란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중년 부부의 성적 문제를 직접 묘사한 <유행가가 되리>와 ‘하룻밤 사랑’에 대한 남녀의 기존 관념을 뒤집어엎은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정점을 찍었다.
순결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있던 드라마들이 10년여의 진통과 변화 끝에, 동거와 혼전 성관계, 미혼모 문제 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지점에 이르렀다. 성 담론의 부담감을 덜기 위해 사용하던 장치들도 이제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시청자 일반의 반감도 예전에 견줘 상당히 사라졌다.
‘성 개방’ 물결이 여기까지 왔다. <옥탑방 고양이>가 동거 등 젊은이들의 성 문제를 사회적 공론장으로 끌어냈 듯, 건강한 토론의 기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드라마의 긍정적 역할이다. 그러나 이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다. 성적 소재를 무조건 ‘성문란’으로 몰아가는 구태의연한 시각과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일부의 시도 모두를 경계해야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