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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를 닮은 여인, <라스트 콘서트>
2000-02-22

눈앞에 닥친 녹음 일정 탓에, 난 집에도 못 들어가며 며칠째 작업실 앞의 여관 신세를 지고 있는 터였다. 난 이런 시기이면, 전화를 받을 때 처음부터 아주 피곤한 듯 목소리를 내리까는 버릇이 있다. 처음부터 잔뜩 피곤한 척을 해야, 다른 약속들을 피해갈 수 있다는 계산때문이다. 막 여관방을 나서려는 순간 휴대폰 소리가 울리고, 난 계산대로 잔뜩 피곤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씨네21>의 황 기자였다. “목소리가 별로 안 좋으시네요… <플란다스의 개>는 다 끝나셨을 텐데….” 나의 대답은 “아…아니요. 괜히 그래 봤어요”였다. 나의 계산은 이렇게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다. 난 아무 저항 없이 나흘 안에 원고를 써 넘기기로 했다. 사실 녹음을 눈앞에 두고 변심한 이유는, 내게 떠오르는 한편의 영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다시 내 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이야기는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다.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이면 가끔씩 난 아버지, 형들과 함께 동네 어귀에 있는 이발소에 가곤 했다. 내 순서를 기다리면서 이발소 한쪽의 소파에 앉아 있는데, 손바닥만한 영화 홍보용 캘린더가 충격적으로 내 눈에 들어왔다. 눈부시게 예쁜 여자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흘리는 얼굴 사진이었다. 그 영화의 제목은 <라스트 콘서트>였고, 그 배우의 이름은 당시 이탈리아의 신인배우, ‘파멜라 빌로레시’였다. 나의 강렬한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개봉날, 난 대한극장으로 달려갔다. 불치병에 걸린 여자가 중년의 피아니스트를 사랑하게 된다는 줄거리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난 영화적인 재미보다는 오직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배우의 모습과 그 뒤에 흐르는 감미로운 음악에 취했다. <라스트 콘서트>는 내게 영화 속에 흐르는 음악의 힘을 느끼게 해준 첫 번째 영화가 됐다. 그날 뒤로 난 극장에서만 정확히 일곱번 돈을 내고 이 영화를 봤다. 당시는 지금같이 비디오가 보급되지 않았던 터라, 그 영화가 간판을 내릴 때 나의 심정은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지는 심정과 다를 게 없었다. 난 영화의 마지막 날 눈물로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것은 내게 정말로 가슴아픈 이별이었다.

그녀가 떠난 뒤 내게 남은 것은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뿐이었고, 난 집에 오면 잠들 때까지 <라스트 콘서트>의 영화음악을 틀어 놓고 살았다. 그리고 영화 속의 스텔라가 메고 다니던 흰색 가방을 늘 한 쪽 어깨에 메고 다녔다. 그 안에는 체육복이나, 운동화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검은 교복에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한 쪽 어깨에 흰색 보조 가방을 메고 다니는 모습을 지금 떠올리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나는 꼬박 일년을 그랬다. 내가 스텔라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방법은 영화 속에 흐르는 피아노 콘체르토를 연주하는 길이었다. 당시 바이엘 수준의 내 피아노 실력으로 그 콘체르토를 연주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스텔라를 위한 열정 하나만으로 수십, 수백번을 반복해서 연습했다. 얼마나 걸렸을까? 아무튼 난 그 음악을 거의 더듬지 않으면서 감정을 실어 연주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금 내가 작곡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된 것은 다 그 때의 피나는 연습 때문이었다. 아마 그 열정이 없었더라면, 게으른 나로서는 피아노를 따로 배우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길고도 강렬한 감정으로 나의 사춘기를 지배했던 첫사랑도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 차츰 잊혀져가게 됐고, 그 뒤로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사춘기의 기억을 모두 잊은 채 살아가던 30대 중반에 문득 그 영화는 다시 한번 내 인생에 찾아들었다. 나에겐 얼마 전까지 아주 즐겨 듣던 FM 방송이 있었다(안타깝게도 지금은 중단됐지만…). 어느 우울했던 날, 그 프로에서 난 오랜만에 <라스트 콘서트>의 테마음악을 다시 듣게 됐다. 왜 그랬을까? 그 순간 사춘기 때와 유사한 충격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20여년 전 흥분케 했던 한편의 영화와 지금 내 인생 사이에 숨겨진 함수관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난 지금까지 마음 속으로 사모했던 여인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그 모두가 한결같이 영화 속의 스텔라와 유사한 이미지를 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뜨악!’ 하며 떠오르는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전혀 낯선 장소에서 만나 마치 예정되어 있었단 듯이 강하게 이끌려 결혼한 지 8년 만에 난 아내가 영화 속의 스텔라와 쏙 빼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연애하던 시절 항상 바지에 점퍼를 입고 다니던 아내의 옷차림과 생김새, 머리스타일, 웃는 모습 그 모두가, 생각해보니, 영화 속의 스텔라와 똑같다. 그 모든 운명의 시작이 나의 사춘기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 스텔라의 연인이 그랬듯이 난 지금 작곡가가 되어 있지 않은가? 사춘기 때 만난 한편의 멜로 영화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사건들에 간·직접으로 개입해 있다는 사실에 난 아연실색하고 만다. 몇 군데를 수소문한 끝에 작업실 뒤의 작은 비디오숍에서 <라스트 콘서트>를 찾았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녹음이 끝나는 대로 집에 돌아가 아내와 함께 그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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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성우/ 영화음악가·<8월의 크리스마스> <정사> <플란다스의 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