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한류 열풍을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주에 미국 출장을 갔다가 LA 시내 한 호텔에 묵었는데, TV를 켜니 중국어로 더빙된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었다. 더빙은 베이징어, 자막은 광둥어.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도 한국 드라마를 꽤 좋아하는가보다’ 싶어 공연히 뿌듯했는데, 가만 보니 뭔가 이상했다.
오로지 ‘대사’밖에 없었다. 상상해보시라! 배경음악도 효과음도 없이, 중국인 성우의 목소리와 입을 벙긋거리는 한국 배우들의 모습만으로 구성된 드라마. 뭔가 빠진 듯한 수준을 넘어, 계속 보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다. 얼마 뒤 두 주인공이 손을 잡고 달려가는 장면이 나오자, 음악이 한곡 흘렀다. 영화 <마네킨>의 주제가로 유명한 <Nothing’s Gonna Stop Us Now>였다. 드라마 주제가는 대체 어디로 실종된 것일까?
그 채널은 한국 드라마 전문채널이 아니었지만, <순수의 시대>(SBS), <다모>(MBC), <대장금>(MBC) 등 다종다양한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었다. 그날 밤 시차에 적응 못해 벌건 눈으로 밤새 보았던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는, 효과음이 아예 없거나 조악했고 배경음악도 간혹 들리는 형편이었다. 한국에서 그 드라마를 볼 때 느꼈던 고유의 ‘아우라’가 사라져버린, 전혀 다른 드라마를 구경했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말은 아마도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일 게다.
국내 드라마 해외 판매를 오랫동안 담당했던 분에게 물으니, 드라마를 촬영한 뒤 국내 방송분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사와 배경음악, 효과음을 각각 분리해두지 않는 까닭이란다. 대사만 지울 수가 없으니 드라마 속 ‘소리’를 모조리 지워야 하고, 결국 ‘그림’만 있는 드라마를 팔게 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드라마 해외 판매가 크게 늘면서, 배경음악만이라도 분리하려는 시도가 잇따라 드라마 주제가(O.S.T)는 살릴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주제가를 제외한 드라마 삽입 음악, 클래식 음악이나 특정 장소(카페나 레스토랑 등)에서 촬영하면서 자연스레 흘러들어간 음악 등은 모두 지워야 한다. 해당 음악 저작권을 가진 업체에 국내 방송분에 대해서만 사용료를 지불한 까닭이다.
방영시간에 맞추느라 분초를 다투는 제작진에게 ‘사운드 분리 작업’은 큰 부담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가 아시아 전역에서 이처럼 각광받는 상황에서, 원본과 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는 드라마를 팔고 있는 현실은 속이 쓰리다. 문득 궁금해진다. 왜 한국에서는 같은 드라마를 한주에 두편씩 잇따라 방송하는 것일까? 일본 배우 기무라 다쿠야를 놀라게 했다는, 한국의 드라마 제작 관행이 정말 효율적인 것인지 제발 누가 좀 나서서 따져봐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