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전쟁>은 오래된 미래였다. 1898년 작가 H. G. 웰스가 화성인의 침공을 걱정한 이후, 1938년 오슨 웰스의 라디오 드라마를 비롯해 몇 차례 웰스의 후예들이 화성인의 침공을 재현하며 일찌감치 미래를 발명한 선배 작가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했다.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은 앞으로 이 작품이 더이상 영화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란 예감을 준다. 도로를 뚫고 올라와서 건물을 날려 버리며 출현하는 외계인의 등장은 매우 극적이다. 지진이나 해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도시 기능 전체를 마비시키는 도입부는 박진감과 공포를 동시에 준다. 절정부까지 휘몰아치는 공포의 리듬은 주인공 레이 페리어(톰 크루즈) 가족의 필사의 탈출기와 맞물리며 객석을 죄어온다. 외계인의 지구 침공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
외계인 침공이 주는 공포는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다. 공포는 우선 그 외계인이 공격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인지, 또는 유기체인지부터 불분명하다는 데서 온다. 왜 지구인(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동부 주민들)을 학살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내뿜는, 맞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광선도 무서우며, 아예 반격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방어벽도 무섭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점보다 더 무서움을 주는 건 없어 보인다. 생김새는 다리가 길고 여럿이며 머리가 커서, 오징어나 주꾸미 같은 두족류(서구인들의 두족류에 대한 공포는 꽤 깊어 보인다)를 연상시키고, 다리의 움직임은 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흡반 같은(또는 여성의 질 같은) 구멍으로 빨아들이는 괴물의 무시무시함은 남성의 ‘이빨 달린 질’에 대한 공포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다리에 칭칭 감겨 피를 빨리는 피해자들은 주로 남성이다). 그것은 또한 피에 탐닉하는 뱀파이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특성들은 <에이리언>류의 SF물에서 익히 보아온 것보다 훨씬 진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외계인은 자신의 가공할 위력으로, 아무런 설명과 사전 예고없이, 전 인류를 멸절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괴물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그런데 전 지구적 재앙은 무책임하고 게으른 가장 레이 페리어의 눈으로 봤을 때만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내에게는 이혼을 당하고 아들 로비(저스틴 채트윈)와 딸 레이첼(다코타 패닝)에게는 무시를 당하는 부두 노동자 레이에게, 외계인의 침입과 자기 삶의 붕괴는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사태다. 소박하게 <우주전쟁>을 읽는 방법은 그래서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9·11 이후(외계인의 침입 경로도 똑같이 미국 동부다. 원작소설의 무대는 런던이다) 미국 시민이 느끼는 외부의 침입에 대한 공포의 재현이며,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붕괴된 가정을 구출하려는 레이의 악전고투이다. 이 영화의 압권은 레이가 딸 레이첼과 함께 숨어든 지하실을 외계인이 뱀같이 생긴 촉수로 구석구석 뒤지는 장면인데, 어느 방법으로 읽든지 영화는 오싹하기 이를 데 없는 공포를 선사한다. 그 뱀같이 미끈거리는 촉수는 현실과 이상이 만나지 못하고 미끄러지게 만든다. 그것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 가장과 굳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들 사이를 갈라놓는 깊은 틈일 수도 있다. 또는 외부의 침입에 본능적으로 돋게 되는 소름이거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백인 주거지역의 주민들이라면 더 치가 떨릴 것이다(영화엔 이상할 정도로 유색인종이 드물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줄곧 가족의 신화를 노래해왔지만 <우주전쟁>은 노골적인 데가 덜하다. 주인공도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자동차 고장 원인 같은 걸 쉽게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뺀다면 레이의 인생은 하류이다. 겁에 질린 딸을 달래는 방법도 모르고 땅콩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도 모를 정도이니 아빠로선 낙제 점수다. 아내가 떠난 뒤로는 냉장고에 아이들 먹을 것 한번 제대로 채운 적이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레이는 가족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스필버그는 위기에 빠진 가족에게 외부로부터의 시련을 던져줌으로써 소통의 가능성을 가족 스스로 찾게끔 한다. 아빠 품을 어색해하고 오히려 오빠를 더 편하게 여기는 레이철의 캐릭터는 이야기에 큰 힘을 준다. 레이가 어떻게 딸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우주전쟁>은 너무 큰 제목이다. 영화는 레이가 가족을 얻기 위한 분투이니 <레이의 전쟁> 정도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 말은 영화를 깎아내리고자 함이 아니다. 재앙영화에 흔히 등장하게 마련인 백악관이나 국무회의, 국방성 같은 클리셰를 다 걷어내고서 영화는 한 가족이 어떻게 고난을 뚫고 나가는가에 집중한다. 거꾸로 말하면, 외계인의 전방위적 침공에 비해 미국 국방부의 무력 대응이 무기력하다는 얘기도 된다. 일방적으로 당하며 수세에 몰리던 군인들이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게 되는 것은 군사력 덕분이 아니라, 평범한 피난민 레이의 관찰력 덕분이다. 무지막지하고 잔인한 외계인의 침공과 그에 맞서는 미국 국방력 사이의 혈전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다코타 패닝 인터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어야 돼요”
다코타 패닝의 성장은 너무 빨라 보인다. 겨우 11살인데 다음 영화 쯤이면 벌써 어른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철 없는 아빠에게 잔소리를 아끼지 않을 때는 엄마의 빈 자리까지 해내는 것 같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다.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는 다코타 패닝의 표정은 레이의 애간장만 태우는 게 아니다.
-스필버그를 만났을 때 그의 작품세계를 알고 있었나
=다른 대단한 영화도 많이 만들었지만 <ET>와 <칼라 퍼플>을 좋아해요. <우주전쟁> 찍을 때 스필버그는 내 아빠 같았어요. 매일 봤으니까요.
-탐 크루즈는 전에 만난 일이 있는지. 만나서 무슨 말을 하던가.
=아뇨. 촬영 며칠 전에 뉴욕에서 만난 게 처음예요. 아저씨가 처음 날 보자마자 번쩍 들어올려 흔들더니 “우리가 <우주전쟁>을 만든단다” 그러시는 거예요.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괴물이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게 쉽지는 않았겠지.
=스필버그가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줘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괴물은 여전히 없는 거니까 어려웠죠. 그래도 너무 어려운 수준은 아니었죠.
-상상력을 써야 했겠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어야 돼요. 그런 상황 속에 날 집어 넣고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는 거죠.
-이야기에 진짜 빠져들었나봐
=사실 찍을 때는 너무 진짜여서 그렇게 믿게 되지만 ‘컷’ 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래, 이건 진짜가 아니야(웃음) 하고 알게 되는 거죠.
-학교 공부는 어떻게 하니
=하루에 네 시간 공부를 해요. 5년 동안 함께 있는 선생님이 있고 그 선생님이 제겐 학교지요. 난 정말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어요. 진짜 학교에 들어갔다면 영화를 하기가 너무 힘들었겠죠.
-좋아하는 일은 뭐가 있니
=말 타기랑 책 읽기요. 말 이름은 골디구요, 주말마다 타요. <맨 온 파이어> 찍은 뒤엔 피아노 치기도 좋아해요.
-친구들이랑은 어떻게 사귀니
=일하지 않을 때는 만나기도 하고 이메일도 하고 전화도 해서 영화 찍는다고 해서 못만나거나 하는 일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