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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의 시나리오 작가 고윤희
사진 이혜정이종도 2005-06-23

연애대학 연애과 박사, 뭐 그런 거 없나요?

빗줄기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어둑어둑한 피맛골. <연애의 목적>을 찍었던 여관 거리 앞에 세워놨더니 내내 뻘쭘한 표정이다.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데 손이 바르르 떨린다. 신인작가의 첫 인터뷰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찻집으로 들어갔다. 맥차를 앞에 대령했더니 자신이 만든 박해일(유림) 캐릭터처럼 활기차진다. 글을 쓰게 하고 말을 하게 하는 최고의 연료는 역시 알코올이렷다.

“동네 꼬질한 극장에서 개봉 첫날 봤어요. 세수도 안 하고 슬리퍼 끌고. 생각했던 것보다 슬펐어요.” 첫 영화가 극장에 올라갔는데 어떤 감격도 없다. 한달 가까이 영화사와 연락 두절이 되었다가 처음 바깥 세상으로 나온 날이 오늘이라니, 축하전화 한통 받을 수도 없던 게 당연하다. 개봉 전에 일찌감치 다음 일거리인 일본 <후지TV>와 싸이더스의 합작영화 <어깨 너머의 연인> 각색 일거리가 주어져 칩거를 했던 것이다. “몇달 만에 회사에 갔더니 분위기가 처음에 싸하더라고요.”

영화도 독특하지만, 그의 입을 거쳐 흘러나오는 연애론도 독특하다. 이 영화는 상처받은 자와 상처를 아직 안 받은 자 사이의 연애담이며, 상처받은 사람이 연애에서는 늘 이기게 되어 있노라고 말했다. 단맛을 아는 자는 지고, 쓴맛을 아는 자는 이기는 게임이 연애라는 그의 지론에 따르면, 박해일은 바람둥이는커녕 약자이며 풋내기이고 이 영화는 그런 박해일의 성장영화이다.

그가 잇따라 내놓는 연애에 대한 통찰이, 식탁 위에 오른 차가운 맥주처럼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연애할 때만큼 이기적인 때가 없어요. 자기 감정에만 빠져들고 그걸 합리화하잖아요. 연애는 술처럼 취하게 해요.” 또는 이런 상처론은 어떤가. “다칠 땐 세게 다쳐야 해요. 평온하고 안정적인 연애는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죠. 아름다운 상처는 상처가 아니에요.” 연애에 대한 정의는 한층 도발적이다. “왜 연애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죠? 그렇다면 연애할 자격도 없는 거죠. 연애에 불륜이 어디 있고 정상이 어디 있나요. 그럼 선봐서 결혼하면 되죠. 불순하고 한심한 게 연애예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해서 그럴까. 아니면 어려서부터 언니들이 물려준 하이틴 로맨스를 줄기차게 읽어서 그럴까. 삼십대 초반이라지만 연애에 통달한 도사 같다. <접속 무비월드> 방송작가로 4년간 일한 게 영화에 ‘통’한 계기다. 시나리오 학원에도 등록했다. 제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연애의 목적>이었고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들, 성인 사이트 취재, 자신의 체험을 뒤섞어 썼다. <연인>의 제인 마치를 모티브 삼아 남자를 중독시키는 팜므파탈 캐릭터를 먼저 풀어갔다. 모델은 교생 실습 나갔던 예쁘고 내숭 센 친구로 삼았다. 한재림 감독이 나중에 합류해 박해일의 캐릭터가 더욱 현실감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야기해보니 ‘고난에서 환희로’ 가는 흔한 성공담이 아니다. 심리학과 다니면서는 나이트클럽이다 미팅이다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어떻게 대사가 이렇게 생생하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얘기는 누구나 잘할 수 있다는 잘난 척 아닌 잘난 척 대답이 돌아왔다. 2년 과정의 시나리오 학원은 한 학기도 제대로 안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쓰면 아무도 안 믿을 거라고 했더니 잘 안 써져서 삭발한 얘기를 써달라고 한다. 영리하지 못해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못하며 일이 안 되면 꼼짝도 못하는 타입이라는 것이다. 이래서야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에게 꿈과 용기를 줄 수 없지 않은가.

역시 캐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글쓰기 대회 나가는 족족 상을 받았다고 한다. 학원에서도 단편으로 최우수상을 일찌감치 받았다. 이 재능을 바탕으로 한 뒤 ‘미치도록 간절하게’ 썼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을 막상 하게 되니 괴롭고 두렵다. “유림이가 홍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도 좋아하니까 그래요.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집착을 하니까.”

또 하나의 괴로움이 추가되었다. “지켜주고 싶은 여자인 줄 알았는데 (영화를 보니) 당신 무서운 여자로군요”라며 한 남자가 떠났다. “다시는… (이런 거 안 해요) 그림 같은 멜로를 쓰리라. 섹스신은 안 넣으리라.” 연애가 안 된다는 게 요즘의 고민이다. 글을 쓰느라 여관 골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더 안 된다. 필이 오르면 수십신도 단번에 써내려가는 이 미모의 작가를 당분간 여관 골방에 내버려두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도 유림처럼 정 수작을 걸고 싶으면 수원 일대의 여관을 찾아다녀보시라. 글이 안 써져 박박 머리를 깎았을 수도 있으니 놀라지는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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