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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판타스틱영화제 준비하는 김홍준 집행위원장

“우리가 진짜 판타스틱영화제를 만든다”

“위원장님, 지금 이미지 관리하실 때가 아니에요. 자극적으로 나가셔야 해요. 그래야 모금운동도 쑥쑥 올라갑니다.” 김홍준 리얼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인터뷰를 나서기 전 김영덕 프로그래머로부터 ‘작전지시’를 받았다. 그 말이 약발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해 말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에서 해촉된 이후 거의 입을 떼지 않았던 그는 장장 2시간30분 동안 부천영화제에 대한 비판과 리얼판타스틱영화제를 만들게 된 배경을 봇물 터진 듯 쏟아냈다. 그의 열성은 사진 촬영까지 이어졌다. 현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원장이자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을 지낸 이 영화계 ‘지도층 인사’는 행인들의 힐끔거리는 눈빛도 아랑곳하지 않고 놀라운 코믹 연기를 선보였다. 영상원과 영화제 외에도 인디포럼 이사, 환경영화제 집행위원,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한국영화 프로그램 담당자로 일하며, 스크린쿼터 문제에 적극 나서는 데다가 내년쯤 10년 만의 신작을 만들려 하는 그에게서 3시간을 받아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건 그가 그만큼 리얼판타스틱영화제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목을 맸다’는 이야기일 것이고, 그 일에 즐겁게 몰두한다는 사실의 방증일 것이다. 김홍준 위원장의 육성 고백, ‘부천에서 잘린 뒤 나 이렇게 살아요’는 짧은 질문으로 시작됐다.

-리얼판타스틱영화제는 어느 정도 준비됐나.

=작품 선정과 확보는 다 끝났고, 상영준비를 하고 있다. 6월21일 공식 기자회견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발표할 예정이다.

-리얼판타스틱영화제를 열게 된 배경을 설명해달라.

=부천영화제에서 해촉될 당시에는 리얼판타스틱영화제처럼 대안영화제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은 솔직히 안 했다. 단지 그들의 잘못된 결정은 내 개인 차원 문제가 아니라 작게는 한국 영화계에 질문을 던지는 하나의 사건이고, 크게는 이른바 정치권력이 문화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영화제는 그동안 일해왔던 팀에 의해서 어떻게든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여러 가지 발언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내 복직투쟁 같은 개인적 문제로 곡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주변에서 권했던 소송을 하지 않은 데도 그런 이유가 있다. 그런데 내 해촉 이후 일어났던 일련의 사태를 보니까 솔직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오해와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잔류해 영화제를 지키고자 했던 스탭들도 결국 자기들의 의사에 반해서 영화제를 떠나게 됐고, 이후 보여진 모습도 부천영화제가 지켜야 할 가치와 본질을 훼손시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래서 전직 스탭들과 뜻을 모으게 된 것인가.

=이 사태 이후 프로그래머를 포함해서 전직 스탭들과 논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자연스럽게 대안영화제도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부천영화제를 잘 알고 있는 해외의 영화인들에게서 이런 취지의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동안 부천영화제는 판타스틱영화, 비주류영화를 한국에서 소개하는 창구였다. 그런데 부천영화제에서 일어난 사태를 안 이상 도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그곳에 내 영화를 보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그들은 또 ‘그러니 당신이 영화제를 한다면 그 영화제를 통해서 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고도 말했다. 난 이 사태를 겪으면서 뭔가를 해야 한다면 정도를 걸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부천영화제의 잘못된 점을 폭로한달지, 목소리 높여 반대를 외치는 것보다는 긍정적인 방법을 통해서 한편으로 항의와 또 한편으로 대안을 만드는 것이 옳은 방법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시대의 패러다임에 맞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게 싸움임은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추해 보이는 싸움을 싫어하니까 쿨하게 싸움을 하자는 거다. 그게 리얼판타스틱영화제다.

-예산확보가 가장 난점일 것 같다.

=세가지 방안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현재 홈페이지(www.realfanta.org)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자발적인 후원금제다. ‘레알판타 선수 100인’과 ‘레알판타 응원단’으로 이름 붙여진 레알판타 패밀리를 모집하고 있는데 액수 못지않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제를 지지하고 있는가를 알게 한다. 이 일을 해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분들은 돈으로 도와주는 분들이다, 가장 확실한 지지는 역시 돈으로 보태주는 것이다, 라는. (웃음) 앞으로 나도 어떤 지지나 후원은 그런 원칙을 가지고 하기로 했다. 두 번째는 이런 자발적인 지원이 우리의 상징적 자산이라고 할 때,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업 스폰서를 찾는 것이다. 현재 한두 군데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긍정적이다. 세 번째는 인쇄물이랄지 홈페이지랄지 이런 곳을 통해 홍보를 제공해주는 광고 협찬이다. 그 밖에 유형무형으로, 서비스와 또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그래도 그 정도로 가능할까.

=부천영화제와 순전히 양적으로만 비교하자면 이건 별 의미가 없는 숫자놀음이다. 부천에 비해 편수로는 4분의 1 정도 규모, 예산상으로는 10분의 1 규모다. 예산은 1억8천만원 내지 2억원 정도로 잡고 있는데 그건 장부상의 액수다. 많은 부분은 실제 돈으로 나오는 게 아니니까. 지금 스탭들은 무보수로 일하고 있고, 많은 분들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돈을 받고 해줘야 하는 서비스를 공짜로 해주고 있다. 영화제를 해본 ‘가락’이 있기 때문에 계산을 해보면 실질적으로 영화제 이전에 현찰로 확보해야 하는 돈은 그리 엄청난 액수가 아니다. 물론 해외게스트는 한명도 초청하지 않고, 부대행사도 없고, 영화제로서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것만 갖춘다는 전제하에서 그런 것이지만. 그래서 내가 스탭들에게 얘기했다. 돈은 걱정하지 말고 하자, 정 안 되면 마지막 카드가 있다, 내가 신체포기각서를 쓰면 된다고. (웃음)

-스탭 규모는.

=스탭은 9명이고 자원활동가가 16명이다. 하겠다는 사람이 많지만 밥값이 없어서 못 받아주는 거다. 나야 다른 직업이 있지만, 다른 스탭들은 실업수당으로 버티고 있다. 고진감래가 오겠지.

-영화제 개최와 집행위원장을 맡는 결정을 하기까지 개인적 고뇌는 없었나.

=이 사태에는 영화제에 구조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고 매년 영화제를 그냥 잘 치러내는 것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결국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프로그래머들이나 스탭들은 분명히 부당한 사태의 피해자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주축이 돼 대안영화제를 한다면 뒤에서 도와야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뒤에서 도와준다는 것은 상당히 비겁한, 혹은 게으른, 혹은 면피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임권택 감독님의 연출부를 거쳐 영화를 찍었고, 영상원장까지 하고 있고, 영화진흥위원도 했고,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도 했고… 양지만 찾아온 것 같은데 이젠 갑자기 광야에 나서는 느낌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찬바람 맞게 내놓고 나는 온실 안에 숨어서 ‘뒤에서 도와줄게’ 이러는 건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는 지금까지 내가 영화쪽에서 얻은 노하우와 인맥들, 행정경험들이 결국 이 일을 하라고 누군가 준비해준 것 아닌가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필요한 만큼 다 쏟아부을 마음을 먹고 있다.

-이름을 리얼판타스틱으로 지은 이유는.

=해외에서 보내준 항의와 격려서한을 중에 영어로 ‘real fantastic film festival’이란 표현이 많이 나왔다. 가짜가 아닌 진짜 판타스틱영화제를 보여달라, 너희가 진짜 판타스틱영화제를 만들어라, 이런 내용의. 사실 ‘리얼’과 ‘판타스틱’이란 말은 양립할 수 없는 거 아니냐. 그런데 그 말이 귀에 익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만약 이 영화제가 지속된다면 이름이 바뀔 수도 있다. 그냥 갈 수도 있지만.

-그런데 또 홈페이지에 가보면 ‘레알 판타’라는 말도 많이 쓰더라.

=‘리얼’(real)이라는 단어가 스페인어로는 ‘로얄’(royal)이라는 뜻이다. 스페인에 레알 마드리드라는 축구팀이 있지 않나. 그래서 우리끼리는 레알, 레알, 그랬고 하다보니까 후원금 기부자들에게도 ‘레알 판타 선수단’과 ‘레알 판타 응원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이 우리 영화제의 애칭을 ‘레알 판타’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뭔가 생동감 있지 않나.

-후원 제도가 특이하다.

=사실 후원금은 부천영화제 때의 숙원이었다. 부천에도 후원회원이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순수한 기부라기보다는 티켓을 받으면서 혜택을 받는 것이었다. 부천에서도 순수한 기부 제도를 만들 때가 되지 않았겠냐는 얘기를 하던 와중 이렇게 됐는데, 지금 레알 판타 후원회원은 100% 순수한 기부자들이다. 두 가지로 나눈 이유는 좀 재밌게 해보자는 뜻에서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힌트를 얻어서 선수단과 응원단으로 만들었고, 응원단은 1만원 이상 낸 분들이고, 선수는 10만원 이상 낸 분으로 백넘버를 0부터 99까지 부여한다. 올해는 그렇게 못하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언젠가 이분들에게 백넘버와 이름을 박은 유니폼을 선물하는 것이다.

-선수단에는 유명인들도 있더라.

=배우 김혜수, 고수희, 오윤홍씨, 이현승 감독, 김광수 청년필름 대표, 조종국 조우필름 대표, 시인 황지우 선생도 있다. 사실 그런 분들도 소중하지만 피판 마니아들이 정말 고맙다. 이 영화제가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고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돈으로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우리에게는 굉장히 큰 재산이다.

-부천영화제와 같은 날 행사를 여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모든 것은 ‘대안’이라는 이유로 양보도 할 수 있고, 부천과 무관한 것으로 돌릴 수 있지만, 적어도 이 리얼판타스틱영화제가 생기게 된 근본이 부천영화제가 갖고 있던 모순과 잘못된 사태로부터 기인했다는 것만큼은 말하고 싶었다. 이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동시에 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정을 피해간다는 것은 저쪽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기회주의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쪽은 우리 때문에 지장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예산이나 지자체의 행정지원, 부천영화제라는 브랜드가 갖고 있는 가치를 놓고 볼 때 비교가 안 된다. 우리가 믿을 것은 관객과 시민, 여론의 판단인데, 같은 시기에 연다는 것은 작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그 의미를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차원이다.

-칸영화제에서 유럽판타지영화제연합(EFFFF) 관계자를 만났다던데.

=지난해 내가 해촉된 직후부터 <스크린 데일리> 등을 통해 이 사태가 알려져 EFFFF에서는 부천영화제쪽에 강한 서한을 보낸 바 있다. 그리고 EFFFF는 5월 칸 총회에서 이 사태와 관련한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칸에서 만난 EFFFF 관계자들은 내게 이후 논의 결과를 설명했는데, 우선 부천영화제의 EFFFF 준회원 자격유지 여부에 대해서는 7월 부천영화제 기간에 EFFFF 간부가 부천을 방문해서 이 영화제가 자신들의 기준에 맞는지를 실사하고 이를 EFFFF 집행부에 보고한 뒤 결론을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둘째로 지난해 신설된 ‘EFFFF 아시안 어워드’는 올해는 시상하지 않는다는 거다. 세 번째는 리얼판타스틱영화제의 EFFFF 가입 여부는 우리 영화제가 지속된다는 계획과 회원으로 가입하겠다는 의사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지 서명도 받았다고 들었다.

=해외영화인들로부터 부천 사태 이후 항의하는 입장을 여럿 받았지만, 리얼판타스틱영화제에 대한 지지는 구체적으로 받지 못했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힘을 얻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영화제는 정치적 힘에 휘둘려서는 안 되고 영화에 대한 열정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주도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리얼판타스틱영화제를 지지한다’ 등의 문구를 적은 종이를 준비해갔다. 약속도 못 잡고 간 터라 길 가다 만난 사람에게 서명을 받는 식이었는데, 모두 13명이다. 제레미 세게이 칸영화제 감독주간 프로그래머, 알랭 잘라도 낭트영화제 집행위원장, 로이드 카우프만 트로마 대표, <버라이어티>의 평론가 스콧 푼다스, 일본의 오구리 고헤이 감독,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이탈리아 B급영화 특별전을 프로그램한 평론가 로렌조 코델리, 유니재팬의 니시무라 다카수이, 프랑스의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 베를린영화제 포룸 창시자 울리히 그레고르, 홍콩의 프로듀서 필립 리, 장 프랑수아 로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프로그래머, 영국의 줄리언 리처드 감독, 그리고 돌아오기 전날 호텔 카페에서 만난 에드워드 양 형님이 그들이다.

-프로그래밍에 어려움은 없었나.

=김영덕 프로그래머가 베를린영화제에 자비를 들여 다녀왔고, 판타스포르투영화제에는 김도혜 프로그래머와 함께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손소영 프로그래머도 유바리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또 지난해 부천영화제를 끝낸 이후 프로그래머들이 해외 출장도 갔었고 여러 소스를 통해 정보도 받았다. 부천에서는 업무상 취득한 정보를 빼갔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영화제의 프로그래밍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뤄지는지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영화제와 배급사의 계약이 이뤄지기 전까지 출품 여부는 계속 구두로만 진행된다. 그런데 초청 가능성 여부를 타진 중이던 영화들이 이 사태가 난 뒤 우리를 선택한 것일 뿐이다.

-올 영화제 프로그램을 소개해달라 .

=영화들은 크게 네 파트로 나뉜다.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이 동구권 SF영화 특별전이다. 그 다음에 해외 신작들인데 나는 하나도 못 봤다. 내가 프로그래머들에게 마음속에 아픔이 있다고 했더니 그러더라. 그건 내가 이들 영화를 안 봐서 그렇다고. 그들은 이 영화를 관객에게 보일 것을 생각하면 행복하고 가슴이 뛴다고 하더라. 세 번째는 한국 장편영화들이고 마지막이 단편이다. 장편은 모두 40편인데, 좀 적은 듯하지만 해외를 보면 이 정도 규모가 마니아를 위한 판타스틱영화제로 적절할 수 있다.

-여건상 이루지 못한 프로젝트도 있나.

=애초에는 지난해 베니스에서 했던 이탈리아 B급영화 특별전을 가져올 계획이었지만, 부천 사태가 터지며 무산됐다. 베니스에는 그 영화들을 보기 위해 쿠엔틴 타란티노가 왔었는데, 그는 이 장르에 대해서도 열광적인 팬이다. 그 자리에서 타란티노에게 로렌조 코델리와 함께 프로그래밍을 해 부천에서 상영하자는 말을 했었다. 만약 이 사태가 없었다면 타란티노가 부천을 방문했을 것이다. 타란티노가 오면 <펄프 픽션> 한국판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일부 지방업자들이 개봉 당시 정신이 없다며 시간 순서대로 재편집해 만든 버전 말이다. (웃음)

-부천영화제 이야기를 안 할 순 없을 것 같다. 결국 해촉되긴 했지만, 재임 중에도 불편하지 않았나.

=근본적인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부천영화제만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제 조직위원들이나 부천시가 영화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지언정 계속 행사를 치름에 따라 영화제의 의의를 알고 전문성이 생길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한편으로는 제도적으로 영화제 집행부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취약한 구조였지만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사람과 시스템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게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집행위원장에서 해촉되고 프로그래머들이 밀려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전임 원혜영 시장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나름대로 강조하셨고 그때부터 계셨던 지금의 조직위원들도 나와 개인적으로 알력이 있거나 하지 않았다. 시 행정부와도 충돌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시장 한분이 바뀜으로써 순식간에 다 바뀌어버린 거다. 그만큼 영화제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고 협조적이었던 조직위원 분들이 한명씩 등을 돌려버리고, 시장님의 뜻에 따라 일련의 결정을 하고. 시의 담당 부처에서도 상식 밖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떻게 같은 사람들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면적 이유로 드러난 이유를 찾자면 시장이 바뀌었다는 것밖에 없다. 그게 나에겐 미스터리다.

-부천쪽은 영상원장 겸임과 대중성의 문제를 제기했었다.

=겸임에 대한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대중성의 문제는 영화제가 시민의 것이 되지 못했다는 것인데, 분명하게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 부천쪽에서는 나와 스탭들이 시민을 위한 영화제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민들 곁에 충분히 다가가지 못했다고 지적받을 수야 있겠지만, 처음부터 시민을 무시했다, 마니아들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했다, 면 나는 집행위원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일 거다. 항상 가장 큰 고민은 더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끌어내고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다. 영화제를 몇년 하면서 시민이 영화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영화제를 후원하거나 관객이 돼서 영화를 보는 행위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직접적인 참가와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좋은 일인 것 같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참여인 것 같다. 그런 것이 작지만 조금씩 문화라는 것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시민들의 의식을 바꿔나가는 것이다. 시민들을 동원해서 어떤 가시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강제적으로 의식을 바꾼다고 해서 시민들의 행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제의 본질과 무관한 민속장터를 만들고 연예인들을 불러온 뒤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기라고 생각한다.

-초여름이 다가왔는데 문득 부천으로 출근해야 한다고 착각하지 않나.

=칸 출장 이후 해외출장이 잦아서 그런 게 덜한 것 같은데, 지금도 부천이 되게 보고 싶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부천에서 일할 때 항상 아쉬웠던 게 호텔이 없다는 것이었다. 해외 게스트들을 한 호텔에 다 재우고 아침도 대접하고 회의도 열면 좋을까, 상상했었다. 얼마 전 부천 인터넷 신문을 봤더니 별 네개짜리 호텔이 생겼더라. 속으로 이제 됐네, 하는데 ‘가만 있어봐, 내가 왜 이걸 좋아하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 순간 되게 슬펐다. 애증이 교차한다고나 할까. 부천영화제가 좋은 소리를 들어도 찜찜할 거고, 비난을 들어도 피붙이가 어디서 야단을 맞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할 것 같다. 이래저래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 같다.

-정말이지 부천영화제가 잘되기 바란다고 얘기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잘되기 바란다고 얘기한다면 거짓말이다. 이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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