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은 유난히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인력이 많이 들기로는 영화나 연극도 못지 않지만, 무생물의 캐릭터가 숨결을 얻고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생겨나기까지 말 그대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누들누드> 시리즈에 이어 두 번째로 요염한 자태를 드러낸 성인용 비디오애니메이션 <고인돌>도 꽤 많은 손길을 거쳤다. 김선구, 오성윤 두 PD와 이춘백 감독, 유승배 배경감독은 그 복잡하고 정교한 전체 공정을 이끈 스탭들. 김선구 PD는 지금은 해체된 제이컴에서 <고인돌> 애니메이션을 처음 추진하던 97년부터 서울애니메이션으로 자리를 옮긴 지금까지 기획 및 마케팅을 담당해왔고, 나머지 세 사람은 오돌또기가 <고인돌>의 제작본부 역할을 맡게 된 지난해 여름부터 합류했다.
네 사람 중 최고참은 배경을 맡은 유승배 감독(43). “그림을 그려서 먹고 살 길이 많지 않아서 찾다가” 애니메이션에 이르렀다는 유 감독은 경력 20년의 베테랑이다. 80년대 초부터 다양한 하청업체와 프리랜서 생활을 거치며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두루 경험을 쌓았다. <닌자 터틀> 같은 해외 작품 외에, <날아라 슈퍼보드> 외 다수 TV시리즈 등 그의 손을 거쳐간 국산 작품도 수편이다. “쳇바퀴 돌듯 하고,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하청일을 주로 하다보니 “우리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갈증이 깊어졌고, 그때 오돌또기를 만났다. “국내에서는 배경을 중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오돌또기에서 하는 작품들은 그렇지 않은 계기가 됐으며, 딱딱하지 않고 새로운 느낌, 질그릇 느낌이 나는 그림 맛을 살려보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오돌또기의 창립멤버인 오성윤 PD(?)도 애니메이션 일에 뛰어든 지 10년이 넘는 중견이다. 원래 화가가 꿈이어서 서양화과를 갔지만, 작업과정이나 전시장의 그림이 너무 정적이고 좀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옆길로 샜다. 미대 연극과랄 만큼 연극 동아리에 열중했고, 연기와 연출을 경험하면서 영화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가진 재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가 애니메이션”이라서 직접 단편 작업을 하게 된 게 입문기. 애니메이션 기획이란 개념도 별로 없던 90년대 초 서울무비에 입사해 기획실을 만들고 8년간 몸담았다. 창작물인 <오돌또기>를 하려고 서울무비를 그만두고, <박재동의 TV만평> 등 기획 프로듀서로서 꾸준히 활동해온 그는, 실제 창작자들 못지 않게 창조적인 역할이 프로듀서라고 말한다. 수많은 스탭들이 참여하는 작업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 그들의 기량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게 돕고, 서로 상승효과를 주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창조.”이기 때문이란다.
이춘백 감독(?)은 오성윤 PD와 선후배 사이. 그림을 좋아했으나 과에는 적응이 안 되고 갈수록 흥미가 떨어졌다.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을 하겠다는 생각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만화를 좋아했던터라 맞겠다 싶어 하청일을 시작했다. 레이아웃부터 동화, 원화, 차츰 복잡한 공정을 배워나가면서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한호흥업 등 하청업체를 거치며 장편 <백조공주> <헤라클레스> 등 디즈니 작품을 비롯한 미국 애니메이션 일을 많이 했다. 기획이 꼼꼼한 미국 작품들은 좋은 경험이 됐지만, “성과물 자체를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창작물의 매력을 뛰어넘진 못했다. 오돌또기에서 창작일을 하자는 오 PD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는 <누들누드>의 <역무원 K> 에피소드로 데뷔했고, <고인돌>에서 총감독을 맡았다.
나이와 경력으로는 넷 중 막내지만, <고인돌>과의 인연은 가장 오래된 김선구 PD(?) 역시 ‘만화’를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빠진 경우. 만화를 직접 그리면서 내심 만화가의 꿈을 키웠던 그는 고교 때까지 미대 지망생이었다. 집안의 반대로 일단 경영학과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그림이 좋아 민화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만화가 옛 민화의 전통을 일부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만화 작업을 하곤 했던 동아리 선배들 일부는 만화 및 애니메이션 업계로 진출했고, 김 PD도 애니메이션으로 길을 정했다. PD로 나선 그는 제이컴의 미완성 프로젝트 <망치>에 참여했고, 관객과 만나는 작품으로는 <고인돌>이 첫 경험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는 작업이니까 ‘윤활유’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하고, 거기서 잡다하지만 능동적인 PD의 역할을 찾는다. “아날로그와 느림, 왜 인간으로 사는 가를 되짚게 하는 작품”이 그의 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