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학은 죽은 자도 말을 한다는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장에 남겨진 핏자국, 시체에 묻어온 섬유 몇올, 치명상의 흔적. 시신을 부검하는 법의관은 그처럼 사소한 단서들을 모으고 의미를 부여해서 범인을 찾아낸다. 소년탐정 김전일도 말했듯이 살해당한 사람은 스스로 범인을 지목하기도 하는 것이다. 퍼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는 만화 <여검시관 히카루>나 TV시리즈 <C.S.I>처럼 그 자체로 경이로운 소재에 법의관이 탐정처럼 수사에 뛰어드는 드라마틱한 설정을 덧붙여서 인기를 얻어왔다. <사형수의 지문>은 콘웰의 네 번째 소설. 다소 밋밋한 전작들에 비해 구멍 안에 또 다른 구멍이 도사린 듯한 겹겹의 음모가 매혹적이다.
버지니아주 법의국장 케이 스카페타는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당한 로니 조 워델의 시신을 부검한다. 워델은 10년 전 약에 취해 TV 앵커우먼을 살해했고, 뚜렷한 지문 때문에 이론의 여지없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미 죽은 워델과 관계있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열세살 먹은 소년이 죽은 앵커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하고, 얼마 뒤엔 살해당한 여자의 집에서 워델의 지문이 발견된다. 꼼꼼하게 단서를 챙기던 스카페타는 누군가의 실수 혹은 음모로 워델의 시신에서 지문을 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신은 태워버렸다. 이제 누구도 죽은 남자가 워델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콘웰은 “나는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알아야만 한다”고 말해왔다. 자신의 단언처럼 콘웰은 경찰서 출입기자와 버지니아주 법의국 컴퓨터 분석관, FBI 아카데미 트레이닝 코스를 직접 거쳤다. 케이 스카페타가 살고 일하는 세계는 콘웰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 때문에 ‘스카페타 시리즈’는 현장에서 다져온 전문지식과 추리능력뿐만 아니라 언제나 세상의 악의와 맞부딪쳐야 하는 스카페타의 피로감까지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긴장만을 추구하는 추리소설이라면 놓치기 쉬웠을 삶의 감각이다.
시리즈에 익숙한 독자는 스카페타의 연인 마크의 죽음에 충격을 받게 될 <사형수의 지문>은 범인을 잡지 못하고 끝나는 미결사건. 스카페타는 범죄를 사주한 자를 체포할 수 없고 범죄를 실행한 자는 놓쳐버린다. 그 범인은 이어지는 <바디팜> <카인의 아들>에도 계속 등장해 스카페타와 승부를 겨루는 ‘템플 골트’ 3부작을 이끌게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