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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보는 <배트맨 비긴즈> [2] - 비주얼
박은영 2005-06-14

<배트맨> 시리즈의 원점, <배트맨 비긴즈>의 비주얼이 만들어지기까지

모든 의상과 소품과 세트엔 다∼ 이유가 있다

배트맨의 기원을 따져 올라가는 <배트맨 비긴즈>에는 설명해야 할 것투성이다. 브루스 웨인은 어쩌다 배트맨이 됐을까? 하고 많은 동물 중에 왜 하필 박쥐였을까? 검은 고무 의상은 어쩌다 입게 된 걸까? 새끈한 배트 모빌은 어디서 났을까? 누가 그를 곤경에 빠뜨렸을까? <대부>나 <스타워즈> 시리즈처럼 이야기의 가운데 토막에서 시작된 <배트맨> 시리즈는 다섯 번째 에피소드 <배트맨 비긴즈>에서 원점으로 돌아간다. “한번도 설명되지 않았던 아이콘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처음으로 돌아가 배트맨의 유래를 서사로, 비주얼로 만들어내는 것이 엄청난 부담과 노동이 수반된 작업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놀란의 <배트맨> 팀은 모든 것을 철저히 ‘리얼리티’에 기반해 세팅했다. 모든 의상과 소품과 세트엔 이유가 있어야 했다. 조엘 슈마허의 아르 데코(Art Deco: 파리 중심의 1920∼30년대 장식미술 스타일)보다는 팀 버튼의 원초적인 디자인에 가깝지만, 광택이 사라진 탁한 흑빛과 장식을 절제한 투박한 디자인을 골조로, “햄릿과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닮은” 배트맨의 어두운 전설은 시작되었다.

슈트_ 브루스 웨인은 어떻게 배트 슈트를 입게 됐나?

<배트맨 비긴즈>

어릴 때 저택의 우물에 빠졌던 브루스 웨인은 자신에게 날아들던 박쥐떼의 악몽을 떨치지 못한다. 부모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적에 대한 복수심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그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박쥐로 몸소 변장함으로써 적을 위협하고 “인간의 나약함을 벗은 상징적 존재”로서 거듭나기로 한다. 물론 혼자가 아니었다. 제임스 본드에게 Q가 있었듯, 그에게는 응용과학 전문가 폭스(모건 프리먼)가 있었다. 폭스는 웨인그룹의 실권을 장악한 이사에게 밉보여 좌천된 인물로, 첨단 무기와 군수용품의 시제품 연구 개발을 맡고 있었다. 고분자 방탄 장비, 가스 충전 자석 갈고리, 350파운드의 무게를 견디는 로프, 전진 부대용 방열복, 전류가 흐르면 단단해지는 초경량 섬유, 충격에 강한 흑연을 함유한 투구 등 비용 때문에 상용화되지 못했던 폭스의 작품들을 동굴 탐험과 패러슈팅을 핑계로 가져다 쓰던 웨인은 배트 슈트를 고안하기에 이른다. 다양한 무기가 달린 벨트, 높은 곳을 오르기에 용이한 갑옷형 장갑, 박쥐떼를 부르는 음향기기가 부착된 부츠 등도 이와 함께 탄생한다.

<배트맨>

<배트맨 2>

귀가 뾰족하고 가슴에 황금색 배트 심벌이 있던 초기 슈트(팀 버튼), 육중한 보디빌더의 몸매처럼 근육의 능선과 윤기를 과장한 중기 슈트(조엘 슈마허)와 달리, <배트맨 비긴즈>의 슈트에는 장식과 광택이 사라졌다. “밤에 싸우러 나가는데, 번쩍이는 질감이나 노란 마크처럼 눈에 잘 띄는 의상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배트맨에겐 슈트 자체가 ‘스텔스(stealth: 모든 탐지 기능에 대항하는 은폐 기술) 머신’이기 때문이다.” 슈트 디자이너 데이 마치의 설명은 타당하게 들린다.

모빌_ 배트 모빌은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했나?

<배트맨>

<배트맨 앤 로빈>

섹시한 곡선은 어디로 간 거야? 배트 모빌의 초기 디자인이 인터넷에 퍼졌을 때 팬들은 경악했다. 팀 버튼이 선보인 배트 모빌은 차체가 낮고 둥글면서도 미끈하게 잘빠진 스포츠카의 모습이었고, 조엘 슈마허의 모빌은 맹수의 근육처럼 울룩불룩하게 조각이 돼 있기도 했고, 상어 지느러미처럼 길고 큰 뒷 날개를 달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배트맨 비긴즈>의 모빌은 스포츠카가 아니라 탱크에 가깝다. 디자이너들의 감각이 떨어졌냐고? 그건 아니다. 이 투박한 디자인은 배트 모빌의 유래를 보여준다.

<배트맨 비긴즈>

폭스의 발명품들을 돌아보던 웨인은 이상하게 생긴 차 한대를 발견한다. 교량 건설용 차량인 텀블러로, 강 위로 점프하면서 케이블을 연결하는 기능이 있고, 변속기를 이용하면 평지 점프도 가능하다는 설명을 들은 웨인의 반응. “검은색도 나오나요?” 이 텀블러를 발전시킨 배트 모빌은 내구성과 돌파력은 탱크 수준인데, 고공에서 또는 지표에서 사뿐사뿐 점프도 잘하는 신기한 물건으로, 빌딩 옥상에서 옥상으로 점프하며 달려나가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여체를 연상시키는 늘씬한 곡선 일색의 자동차 디자인에 신물이 났다”는 디자이너는 스포츠카 람보기니와 군용 차량 험비를 절충해 원하던 ‘각진’ 디자인을 얻었다. 감독의 요구대로 “<프렌치 커넥션> 같은 실감나는 추격신”을 위해선 무늬만 자동차인 모형이 아니라 ‘실연’을 펼칠 진짜 자동차가 필요했다. 그렇게 특수 제작된 총 8대의 차량은 프런트 액셀러레이터가 없어 급회전이 가능하고, 기능별로 차별화된 트럭용 타이어를 장착한 것들이었다고. “나는 이 차의 소음이 좋았다. 오지 오스본이 귀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고 할까. 그래서 차를 탈 때마다 나도 맞서 고함을 지르곤 했는데,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크리스천 베일의 배트 모빌 시승담이다.

악당_ 배트맨과 맞선 최초의 악당은 누구인가?

<배트맨>의 조커

<배트맨2>의 펭귄맨

“인류 최초의 살인 예술가”를 자처했던 기괴한 미소의 조커, 부모와 이름을 찾고 싶었다던 흉측하지만 가련한 펭귄맨, 여자의 한과 설움을 담아 채찍을 휘두르던 캣우먼, 테러로 화상을 입고 배트맨에 대한 원한을 키운 투 페이스, 뇌파 실험에 대한 집착과 웨인에 대한 열등감으로 뒤틀린 리들러, 죽은 아내를 살리려다 극저온 용액에 빠져 얼음 인간이 된 미스터 프리즈, 동식물 교배 실험 사고로 그 자신이 맹독을 품은 식물로 변한 포이즌 아이비. <배트맨> 시리즈의 역대 악당들은 열거하기에도 숨이 차다.

<배트맨 비긴즈>의 헨리 듀커드

외모도 목표도 능력도 각양각색이지만, 단순한 집착과 열등감을 지닌 인간이었던 이들은 불의의 사고로 ‘괴물’이 됐거나, 브루스 웨인의 배트맨처럼 기묘한 ‘양면성’을 지녔더랬다. <배트맨 비긴즈>는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기까지의 사연을 충실히 따라가는 만큼, 그와 그가 속한 세상을 위협하는 악당들 또한 복잡다단한 사연을 지닌 인간들로 포진시켰다. 브루스 웨인의 부모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거리의 부랑아, 고담시를 마약과 폭력으로 물들인 암흑가의 황제 팔코니, 그의 일당을 병원으로 빼돌려주는 의사이자 마약 딜러인 크레인(일명 허수아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딸려나오는 악당들. “두려움을 끌어안고 어둠과 하나가 돼라”고 일러주던 웨인의 멘토 헨리 듀커드(리암 니슨), 그 배후에서 어둠의 사도들을 이끄는 무사 라스 알굴(와타나베 겐)은 세상을 정화한다는 신념을 과격하게 밀어붙이며, 선과 악이 한끗 차이라는 진리를 입증해 보인다.

도시_ 태초의 고담시는 어떤 곳이었나?

<배트맨 비긴즈>

모든 문화와 기술이 뒤엉켜 통제 불가능한 속도로 달려가는 도시 고담의 모델로서 뉴욕만큼 적합한 곳도 없을 것이다. 이미 이전 시리즈에서 밑그림으로서의 뉴욕을 드러냈던 고담시는 <배트맨 비긴즈>에서 불황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대도시의 리얼리티와 배트맨이 태어난 둥지로서의 신화적 색채를 함께 아우르고 있다. 팀 버튼의 어두운 안개 도시와 조엘 슈마허의 원색 불빛 가득한 도시 같은 판타지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대신 오늘의 관객이 살아가는 도시의 리얼리티를 보여주기 위해 로케이션 촬영을 대폭 늘리면서 시카고의 건축물과 런던의 거리를 많이 활용했다는 후문. 빈민굴 내로우스는 뉴욕의 루스벨트 섬과 도쿄의 프리웨이, 홍콩의 구룡반도를 모델로 설계했고, 웨인 가문의 성은 <아이즈 와이드 셧>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영국의 멘트 모어 타워스에서 촬영했다.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위해선 아이슬란드의 바트나조툴 빙하에도 찾아갔고, 영국의 스튜디오에 도시 세트와 미니어처를 세워 특수 촬영하기도 했다.

<배트맨>

<배트맨 앤 로빈>

프로덕션디자이너 네이던 크로울리는 고담시의 컨셉을 이렇게 설명한다. “팀 버튼의 고담은 전적으로 산업화된 도시의 이미지였다. 뉴욕이든 LA든 오늘날의 대도시에선 산업(industry)보다는 상업(commerce)이 앞선다. 우리의 고담은 기본적으로 상업화된 도시의 이미지다.”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지, 자본이 일으키고 무너뜨리는 고담시에선 모든 게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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