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를 처음 봤을 때 고양이는 내게 스쳐지나가는 단역에 불과했다. 길도 잃고 아직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그 동물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환유로만 보였다. 지영(옥지영)은 길에서 주운 새끼 고양이를 혜주(이요원)의 생일선물로 줬고, 혜주는 “키우려니 의외로 손 많이 탄다”며 다음날 덜컥 되돌려줬다. 고양이는 계속 떠도는 운명이다. 지영에게서 태희(배두나)로, 태희에게서 쌍둥이 자매에게로. 스무살 그녀들은 자신을 챙기기에도 벅찰 뿐이니 무책임하다고 비난할 구석은 없다.
한달 전, 지영이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바카스의 충직한 신도임을 확인하고 슬쩍 휘청거리며 새벽 귀가를 끝낼 무렵, 갑자기 “야옹” 소리와 함께 나타난 고양이. 아직 덜 자란 그 녀석은 고양이답지 않게 친한 척하더니 슬슬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엘리베이터를 거쳐 오피스텔 안까지 스킨십 하나 없이 입성했다. 원나잇스탠드를 끝내고 다음날 오전 가던 길을 가라고 내줬건만 녀석은 골목길 한구석에 초조하게 웅크리고만 있었다. 그래서 ‘야야’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새끼를 밴 고양이가 보금자리를 얻으려 사람을 따라오는 경우가 가끔 있으니 확인해보라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이 만남은 여전히 수상쩍다. 굳이 인연을 찾자면, 나는 ‘개’과 인간에서 ‘고양이’과로 변태 중이고, 녀석은 고양이의 탈을 쓴 개에 가까우니 뭔가 친연성이 있지 않았나 짐작하는 정도다(야야는 조금의 틈만 허용해도 내 가슴으로, 허벅지로 파고든다).
생애처음 맞이하는 동거에 갈등이 없을 리 없다. 나로선 하루 종일 좁은 방에 야야를 외롭게 홀로 놔둬야 한다는 점과 암컷이니 발정기가 오기 전에 되도록 빨리 중성화 수술을 시켜야 한다는 점이 걸렸다(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자비로운 맘을 가진 것 같지만 침대와 식탁을 뒤덮는 녀석의 털과 여기저기 긁어대 너덜너덜해지는 집구석을 보는 건 몹시 가슴 아프고 화나는 일이다). 그리고 녀석의 불만? 당연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지시한다. 내가 너에게 먹을 것과 잘 곳과 쌀 기구를 마련해줬으니 내 리듬에 맞춰라. 하루 종일 자다깨다를 반복하던 야야는 대체로 늦게 귀가하는 나를 편히 재우지 않는다. 처음에는 새벽에 발정난 고양이처럼 울어대 기겁하게 만들었다(옆방의 자명종 소리나 코고는 소리에 잠을 깨는 게 가능한 오피스텔이다). 달래다 달래다 안 돼 새벽에 잘가라 이별했다가 다음날 다시 상봉하길 두 차례 정도 했더니 다음 단계에 진입한다. 소리는 안 내는데 침대에서 조용히 자다가 자꾸 손과 발을 물어댄다. 꽤 아프다. 콧등을 때려주며 그러지 말라고, 자야 한다고 몇번 다그쳤더니 이것도 좀 자제하는 분위기다. 자기 발로 내 발을 끼적끼적거릴 뿐이다. 이젠 뭔가 대화가 이뤄지는 것 같아 감동 속에 잠들고는 한다(야야의 표현수단이래야 소리 지르는 것과 무는 것 두 가지밖에 없으니 나는 굉장히 가부장적이다). 이따금 언어 뒤의 감정과 정서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소통충돌이 생기기 일쑤인 인간 사이의 대화보다 차라리 이런 무언의 대화가 더 낫다고 흐뭇하게 ‘오버’하기도 한다.
어쨌든 답답하다. 너, 수술까지 당해가며, 만날 독수공방하면서 나랑 살 의향이 있는 거니, 라고 물을 수 없으니. 야야를 자유롭게 골목대장시키다가 가끔 조우하면 내 집에서 휴가를 즐기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내릴 무렵, 야야를 키우고 싶다는 고양이 마니아가 나타났다. 비겁함과 무책임 사이의 어느 곳에 있다고 해도 할말이 없다. 찡찡대고 떼쓰는 아이를 낳아 열심히 키우는 이 세상의 부모들이 다시 한번 존경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