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MBC 드라마의 오랜 팬이다.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편파적으로, 나는 MBC 드라마를 좋아한다. MBC가 ‘드라마 왕국’이던 시절이 있었다. 새롭고 독특하고 개성적이며 시청자들의 욕망을 딱 반 발짝 앞서 읽는 혜안이 돋보이는 작품을 종종 선보이던 때다. MBC 드라마국에는 시청자들도 그 이름을 알아 모시는 스타 연출자들이 즐비했더랬다. 황인뢰 PD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듯 <창밖엔 태양이 빛났다>를 붓질하는 사이, 오현창 PD는 따뜻하고 정직한 서민의 눈으로 <달수 시리즈>를 빚어냈다. 안판석 PD는 <장미와 콩나물>이나 <아줌마>를 통해 일상의 사소한 일들, 고만고만한 삶에서 불현듯 터져나오는 유머의 마법을 펼쳐보였다. 이진석 PD, 이창순 PD, 이승렬 PD, 장수봉 PD…. 생각나는 사람순으로 두서없이 엮어도 한 다스는 족히 된다.
화가와 장인과 재담꾼과 마법사들이 저마다 개성을 뽐내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곳일까, 상상해보곤 했다. 시청률 경쟁이 아무리 치열하다 해도 삭막한 곳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번 실패했다고 다시는 드라마 제작을 맡기지 않는 야멸찬 동네가 아니지 않은가. 한명의 연출자를 만들기 위해 5∼7년의 훈련을 시키고, 단편 드라마로 감각 익힐 기회도 주고, 흥행에 성공 못했다고 당장 내치는 것도 아니니,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으로 꼽히는 드라마는 어찌보면 가장 덜 자본주의적인 시스템 아래서 제작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나름의 개성을 자랑하는 PD들은 물론, 그 PD들이 상징하는 제작 문화와 독특한 공기, 그리고 새로움에 대한 기대, 그 모든 것들 때문에 MBC 드라마를 좋아했던 것 같다.
이 새삼스런 애정고백은, 스타군단이 독립 프로덕션으로 자리를 옮긴 뒤 끈 떨어진 신발마냥 풀이 죽은 MBC 드라마에 바치는 응원가다. 힘내라, MBC 드라마야. 당장 시청률 대박을 보장하는 스타 PD가 없다고 주눅들지 말고, 기껏 스타 PD로 키워놓았더니 유명 배우와 해외 로케로 금띠 두른 드라마 만들어 경쟁사에 갖다바친다며 ‘집나간 오빠들’을 째려볼 일도 아니다. 왜? 정신건강에 안 좋으니까.
얼마 전 방영된 <떨리는 가슴>을 보면서, 나는 정말 가슴이 떨렸다. MBC 드라마가 드디어 상큼발랄한 실험을 하는구나, 싶어서다. 5명의 PD와 5명의 작가가 동일한 캐릭터를 ‘같고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며 만들어낸 <떨리는 가슴>은 뜻밖에 받아든, 잘 차린 밥상 같았다. 12회를 맛있게 먹어치운 뒤 여전히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두리번거리다 <환생-넥스트>를 발견했다. 주찬옥 작가를 비롯해 노련한 작가들과 젊고 참신한 PD들이 호흡을 맞춰 매주 빛깔 다른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예정된 작품이 어그러지는 바람에 긴급 투입됐다’든지 ‘두편씩 끊어지는 포맷을 선택한 건 후속작이 준비되면 언제든 끝내기 위해서’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동기야 어쨌건, 이왕 시작했으니 마음껏 실험했으면 한다.
소재도, 형식도, 배우도, 작가나 연출자 기용면에서도 과감하고 번득이고 패기 넘치는 MBC 드라마를 보고 싶다. 이는 외주 프로덕션에서는 하기 힘든 일이고, 거대 방송사의 소명이기도 하다. 자꾸자꾸 뻔뻔해져라, MBC 드라마야. 그래야 내 오랜 짝사랑이 헛되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