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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같은 현대의 사랑법에 대한 고찰, <녹색의자>
이종도 2005-06-07

2005년 한국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현실을 이해하는 데 있어 법은 열등생이다. 법은 현실을 뒤늦게 이해하고 뒤늦게 현실을 반영한다. 앎도 마찬가지다. 앎은 사건이 일어난 뒤에 사후적으로 뒤늦게 구성된다. 윤리는 소문난 뒷북이다. 후진적인 사회일수록 이들 뒷북 삼총사의 속도는 더더욱 늦어지고 개인의 자유는 더 움츠러든다. 대신 이 뒷북 삼총사는 큰 힘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지배한다. 예술이 여기에 충격을 줄 수 있지만 그마저 검열의 그물에 걸려 꼼짝하기 어렵다. 2000년 12월, 30대 기혼 여성과 10대 남성 사이의 이른바 역원조교제 사건은 개인의 자유에 적대적이면서도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사회의 분열적 증상을 드러낸 사례였다.

<녹색의자>는 5년 만에 뒤늦게 한국사회를 향해 발언한다. 의미심장한 현(심지호)의 성인식 장면이다. 여기는 영화 안에서 가장 주목할 만하고 미학적 충격도 안겨줄 수 있는 대목이다. 현의 부모와 문희(서정)의 전남편을 비롯한 각계각층, 여러 세대의 목소리가 술자리에 한데 모여 저마다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마치 장 아누이의 연극 <그리운 앙트완느>에서 장례식이 되어서 비로소 모든 이들이 모여 진실을 말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사회의 완강한 편견에 가로막혀 목소리를 내지 못한 두 연인을 위해 영화는 마이크를 늦게나마 대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편집증적인 한국사회가 드러나지 않는다. 고압적인 경찰, 편견에 찬 노인보호시설 담당자, 선정적 보도에 골몰하는 기자들이 나오지만 그들의 행동은 너무 도식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 완강한 편견에 짓눌리고 있는 연인들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비록 친구의 집이지만 안락한 보금자리가 있고, 차가 있고, 노동의 강박이 없고, 외로워 보이지도 않아 그저 나이 차이 나는 연인들로만 보인다. 5년 전이었다면 새로운 소재였을지 모르지만 벌써 시대는 많이 변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지금도 유효할까. 소통이 불가능한, 사막 같은 현대의 사랑법에 대한 고찰은 이미 누군가 오래전에 하지 않았는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좀더 격렬하고 좀더 정치적인 버전이었어야 할 <녹색의자>는 변화한 시대의 공기를 놓치면서 예민한 소재가 갖고 있는 폭발력도 방전시키고 있다. 이해받지 못하는 두 연인을 옹호하려 했다면 별다른 완성도나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정사신, 의미없는 대사들과 에피소드들을 걷어내고 싸움에 진력해야 옳았을 것이다. 만약 싸움을 건 것이 아니라 두 연인의 소통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면? 수다스런 대사보다 오히려 고독한 눈빛이 제격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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