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은 고르게 내리쬐지 않는다. 장 클로드 카리에르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면 신이 이 남자를 특별히 편애하고 있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도대체 5개 국어 이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가가 존재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저 단순히 시나리오작가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만화가이자 소설가이며 배우와 감독일까지 한다. 더 나아가, 정말 너무하는군, 프랑스영화학교(FEMIS)의 교장이자 극작가·작곡가협회(SACD)의 회장이기도 하다.
카리에르는 40년에 육박하는 세월 동안 70편이 넘는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작가로서의 카리에르를 세상에 알린 것은 거장 루이스 브뉘엘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그는 <시골 하녀의 일기>(1964)로 첫 인연을 맺은 뒤 최후의 작품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 이르기까지 줄곧 브뉘엘의 파트너로 일했다. 카리에르 초기의 또다른 파트너는 루이 말과 자크 드레이. 누벨바그와 장르 영화 사이의 뻥 뚫린 공간을 채울 만큼 카리에르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증거이다. 체코의 망명감독 밀로스 포먼의 할리우드 데뷔작 <탈의>(1969)도 그의 작품. 작가로서의 그의 경력이 유럽을 넘어서 할리우드로 뻗어가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카리에르는 코스모폴리턴이다. 그와 함께 일했던 감독들의 국적을 따져보자면 지구본을 뺑뺑 돌려야 한다. 루이스 브뉘엘(스페인), 밀로스 포먼(체코), 안제이 바이다(폴란드), 폴커 슐뢴도르프(독일), 오시마 나기사(일본), 헥토르 바벤코(브라질), 웨인왕(홍콩), 그리고 루이 말, 자크 드레이, 장 뤽 고다르,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장 폴 라프노(프랑스). 그래서인지 그가 참여했던 영화들 중에는 유독 국제적인 합작프로젝트가 많다. 가령 <당통>을 보면 제작사는 프랑스의 고몽인데, 감독은 폴란드의 안제이 바이다이고, 배우는 각각 프랑스와 폴란드를 대표하는 국민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와 보이체크 프소니아크, 그리고 세계배급은 미국의 컬럼비아가 맡는 식이다.
카리에르의 작가적 역량과 국제적인 언어감각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영화는 <프라하의 봄>. 이 영화의 원작자인 밀란 쿤데라는 자기 작품의 번역과 각색에 대해 거의 선병질적인 거부반응을 보이는 작가로 유명한데, 그런 그도 각색자가 카리에르라는 말을 듣고는 더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니 그가 어느 정도의 국제적 신뢰를 쌓고 있는지 알 만하다. 덕분에 <프라하의 봄> 역시 세계 각국의 대표선수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코스모폴리턴적 영화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카리에르는 할리우드에 에이전트를 가지고 있는 외국인 작가들 중에서도 언제나 첫손가락에 꼽힌다. 이를테면 그는 할리우드가 가장 신뢰하는 유럽쪽 파트너이자, 유럽영화인들이 할리우드와 합작하거나 진출할 때 교두보 역할을 해주고 있는 작가인 셈이다.
카리에르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유럽 부르주아의 현학취미 내지는 예술 영화 성향과 할리우드의 상업 영화 전략이 행복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유럽 작가인가? 할리우드 작가인가? 그의 대답은 엉뚱하게도 ‘프랑스 작가’이다. 그 대답에는 물론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이라는 문화주의적 오만이 밑에 깔려 있다.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긴다.” 프랑스영화학교 교장 카리에르는 그렇게 손자병법을 들먹인다. “할리우드영화의 진정한 작가가 누군지 아십니까? 시나리오작가도 아니고 감독도 아닙니다. 제작자지요. 상업 영화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는 할리우드에 가장 가까운 유럽인 작가이면서도 할리우드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할리우드영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좋은 영화인 것은 아니지요. 오슨 웰스나 구로사와 아키라가 할리우드를 떠나 우리와 함께 일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명확한 것 아닙니까?”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있어서 유럽영화판이 쓸쓸하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와 유럽영화인들이 할리우드를 충분히 ‘이용'하면서 결국엔 그것을 넘어서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나라에도 카리에르처럼 든든한 어른이 한명쯤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