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부터 그 모양이었을까? 아들은 아버지를 흉내내며 어른 행세를 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야단치며 엉덩이를 때리지만, 어느 순간 둘이 어울려 깔깔대며 장난을 치고 있다. 얼음 구덩이에 빠지고, 표범에게 쫓기고, 대머리가 되고, 집을 불태워버리고…. 온갖 사고들이 이어지지만 그 하나하나가 즐거울 뿐이다. 어머니와 딸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그 부계사회의 로망은 70년 전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존재했다.
에리히 오저는 나치시대의 독일 만화가로, 밀고에 의해 감옥에 수감된 뒤 괴벨스의 사형 명령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적 운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록 그가 사회민주주의적인 경향이 있었고 반나치적인 풍자만화를 그린 적도 있지만, 나치의 본격적인 폭정이 시작된 이후의 대표작인 <아버지와 아들>(1934∼37)이 다분히 비정치적이었고 정부의 캠페인에도 널리 이용된 캐릭터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단지 반국가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웃 사람의 고발에 따라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매우 어이없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역사의 아이러니를 넘어선 작품 <아버지와 아들>은 70년을 넘어 우리 앞에서 새로운 빛을 발하고 있다.
작품이 연재된 시대적 배경을 모르고 접한다면, 과연 이 만화가 현대의 작품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버지와 아들>은 보편적인 주제를 세련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어머니의 존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독특한 부자(父子) 가정의 두 사람. 심지어 윗대로도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하나씩밖에 없고, 집안의 초상화는 대대로 아버지가 외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어머니의 잔소리를 배제해버린 가정에서, 부자는 마음껏 말썽을 부리고 모험에 휩싸인다. 처음에는 소시민의 가정에서, 다음에는 큰 유산을 상속받은 부자로, 다음엔 무인도에 떠내려간 표류자로…. 어느 상황에서든 부자는 쾌활한 낙천주의로 새로운 소동을 벌이고 그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 시대가 험난할수록 행복은 가장 평범한 순간에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