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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씨네21> 영화평론상 [2] - 김지미 작품비평

첫눈에 반한다는 것의 미혹, 그뒤에 가려진 타자의 욕망

<클로저> 김지미 작품비평 전문

<클로저>

마이크 니콜스의 <클로저>(Closer)를 보고 있으면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hka)가 그린 티체(Tietze) 부부의 초상화가 떠오른다. 코코슈카는 25살의 젊은 예술가인 티체 부부의 결혼 기념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 둘을 따로따로 스케치하여 하나의 화면 안에 배치했다. 그려지는 동안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있던 그 부부는 하나의 화폭 위에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들의 엇갈리는 행동과 시선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하나된 그들이 여전히 개인적인 공간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들의 손인데, 분명히 서로를 향해 내뻗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개의 손은 결코 만나지 않는다. 이 네개의 손들처럼 <클로저>의 네명의 주인공들, 앨리스(혹은 제인), 대니얼, 애나 그리고 래리는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4년 동안을 사귀고 같이 살고 섹스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때리기까지 하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철저하게 낯선 사람(stranger)로 남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 그것은 앨리스가 대니얼에게 건넨 첫마디이며, 애나의 사진 전시회의 주제이며 앨리스와 대니얼의, 애나와 래리의 사랑의 암호이기도 하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낭만적 사랑을 위한 완벽한 첫 단추 같지만, 그 안에는 나르시시즘적인 함정이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얼굴을 한 자기 자신에게 매료되기 때문이다. 네명의 주인공은 서로를 향해 ‘사랑해’를 외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는 것은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한 타자가 아닌 자아의 욕망이다. 부고기사를 작성하던 대니얼은 앨리스의 삶을 훔쳐서(steal) 작가가 되지만, 그 책의 표지를 찍어주던 애나와 키스한 뒤 그녀에게로 도망갈 궁리만 한다. 애나는 대니얼과 래리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안정된 삶과 죄의식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그녀의 성적 만족을 추구한다. 래리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연인들을 단죄하고, 결혼 이후에도 자신의 음란한 성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시도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순수하게 사랑을 추구한 것처럼 보였던 앨리스도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다던 대니얼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 자신의 정체성을 노출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래리가 그토록 싫어하던 욕실 안의 큰 거울처럼 거대한 거울 속에서 살고 있다. 그 거울이 던지는 질문은 당연히 ‘도대체 너는 누구냐?’(Who the fuck are you?)이다. 그러나 그 거울 속의 ‘너’는 한번도 ‘나’를 빠져나가 타자에게 닿지 못하고, ‘나’에게 끝난다. 애나의 전시회 첫날, 대니얼은 애나와의 밀회를 위해 여행을 준비한다. 대니얼의 여행의 목적을 짐작하던 앨리스가 그의 거짓된 약속에 대답 대신 응시하는 것은 대니얼의 뒷모습과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 거울이다. 거울은 타인의 시선과 욕망을 비추지 않는다. 오직 바라보고 있는 주체의 응시만을 되돌려줄 뿐이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끝없이 반사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브인 ‘수족관’(aquarium)은 네 인물이 구성하고 있는 세상을 은유하는 기호로 사용된다. 각각의 인물들은 그 수족관 안을 떠도는 일련의 물고기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바다에 소변을 보기 때문에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앨리스의 결벽증적 태도는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으면 떠난다. 그녀는 물 속을 부유하는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믿을 수 없는 말로만 된’ 사랑을 피해 떠다닌다. 물고기를 정신적인 치유의 도구(fish-therapeutics)로 삼는 애나의 의존적 태도는 그녀가 끊임없이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가려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수족관처럼 안전하고 잘 관리되는 일부일처제의 제도 속에 안착하려 한다. 그러나 수족관의 물고기가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관계 밖의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앨리스에게는 튜나 샌드위치를 제공하려다 거절당하고, 애나로부터 ‘수족관’(Aquarium)이라는 제목을 선사받는 대니얼은 두 여인 사이를 부유한다. 그의 소설은 앨리스처럼 자유롭고 섹시하지만, ‘수족관’이라는 제목 안에서 생명력을 잃고 실패한다. 인간은 유인원이 되기 전에는 물고기였다고 말하는 래리는 수족관에서 애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수족관처럼 안정된 그러나 다소 폭력적으로 독점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이 영화에는 수많은 ‘섹스 토크’(sex talk)가 있지만, 실제 성관계가 직접적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일은 없다. 언제나 섹스 그 이후의 장면만 그려질 뿐이다. 바타이유의 말처럼 섹스가 두 연인의 존재의 불연속성을 넘어서서 연속성과 융합을 경험하게 하는 찰나적 체험이라면, 섹스 이후의 세계는 다시 불연속성의 심연으로 떨어진 존재의 비감이 더 극대화되는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남성 인물들인 대니얼과 래리는 자신의 여자 몸 위로 지나간 낯선 육체의 흔적만을 보게 된다. 그 시선 속에서 여성의 몸은 수족관의 유리처럼 투명해지며 그 위에 새겨진 타인의 욕망만이 포착된다. 그들을 흥분시키거나 좌절시키는 것은 여성의 몸이 아니라 그녀들을 욕망한 또 다른 남성의 시선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여성 인물과 교통하지 못하고, 그들이 나눈 인터넷 채팅처럼 여자의 육체를 가장한 대상을 둘러싼 남자들끼리의 자위(wank)에 머무르고 만다. 그래서 모든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 대니얼의 사랑인 앨리스는 묘지 위의 비명(碑銘)으로, 잠든 래리의 침대 옆에 누운 애나는 공허한 눈빛으로 남는다.

<클로저>는 마이크 니콜스의 오래된 영화 <졸업>에서의 벤자민과 일레인이 결혼식장을 빠져나온 이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두 주체의 순간적인 홀림과 극적으로 마주잡은 두손, 사랑은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시작한다. 서로에게 강한 끌림으로 시작된 사랑이 수많은 미혹과 또 다른 끌림에 어떻게 저항하거나 무너지는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인 <클로저>는 사랑에 관한 영화지만 흔히 사랑에 접합되는 긍정적인 수식어들과 결별한다. 주체가 사랑하는 이에게 더 가까이(closer) 다가가려는 순간, 그 시도는 타자의 고유한 공간을 침범하며 둘 사이의 사랑은 혹은 주체와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은 닫혀(closed)버린다. 이 영화 안에서 네명의 인물은 어떤 사회적 맥락과도 유리된 채 인간관계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데, 그럼으로써 ‘소통불가능성’이라는 덫에 빠진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는 ‘친밀한 관계’(intimacy)를 통해서도 극복될 수 없다는 마이크 니콜스 혹은 페트릭 마버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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