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기억조차 전설이 되어버린 폐허의 세계, 외롭게 고립되어 궁핍에 시달리는 마을, 어설픈 감정은 가슴속에 숨긴 채 주어진 의무의 길을 따라야 하는 왕녀…. 다카하시 신이 <최종병기 그녀>에 이어 국내 팬들에게 선보이는 만화 <너의 파편>은 누가 보더라도 미야자키 하야오를 떠올리게 한다. 단순히 장르 안의 재해석이 아니라 설정에서부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의도적 모방의 냄새가 짙더니, 연이어 <모노노케 히메> 등의 캐릭터와 의상을 들이대고 있다. 그로 인해 패러디인가 오마주인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다카하시 특유의 눈물범벅과 수줍은 듯 능글맞은 개그는 쉬지 않고 이어진다. 화면 속의 그치지 않는 눈발만큼이나 어지러운 만화다.
‘윗 세계’라 불리는 이곳은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채 눈에 파묻혀가는 얼음의 도시다. 왕녀인 이콜로는 말뿐인 왕족으로, 공부를 마치면 차가운 왕궁의 대리석 바닥을 닦은 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으로 돌아가 앞 못 보는 동생을 돌보아야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살아간다는 자격지심에, 권세는 없는 허울만의 지위가 그녀를 더욱 괴롭힌다. 옛 왕인 아버지가 연구했던 ‘태양’에 대한 꿈만이 그녀를 지탱해줄 뿐이다.
만화의 초반, 이 복잡한 세계상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호흡 가쁜 사건들이 주인공들을 토끼몰이한다. 이콜로는 ‘히토가타’라는 비밀의 존재로, 희로애락 중 어느 한 감정을 결여한 채 태어난 아이다. 모든 감정이 풍부하지만 웃을 줄만은 모르는 소녀는 자기 집 지붕을 뚫고 내려온 수갑 찬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아픔이라는 감정을 느낄 줄 모르고, 세상엔 ‘적’과 ‘친구’만 있다고 알고, 지독한 건망증에 시달린다. 전족(戰族)의 군인들에게 쫓긴 소년과 소녀는 교과서에서만 배운 ‘아래 세계’로 떨어져내리고, 이 불행한 세계의 더욱 불행한 비밀 속으로 들어간다.
귀여움 속의 진지함, 눈물을 이기는 모험, 연이은 전투 너머로 떠오르는 꿈. <너의 파편>은 만화가 스스로 ‘최초로 그리는 소년 만화’라고 말하듯, 소년 만화의 요소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평범한 소년 독자들이 이 만화 속의 어수선하기까지 한 복잡함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것은 의미를 위한 복잡함보다는 유희를 위한 복잡함에 가깝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