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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 누>를 말하다 [1]
사진 손홍주(사진팀 선임기자) 정리 이영진 2005-05-17

미스터리 역사물의 발견 <혈의 누> 김대승 감독 인터뷰

“마지막 영화라는 심정으로 죽어라 달렸다”

김대승 감독은 스스로 소심한 인간형이라고 털어놓는다. 이전 인터뷰에서 “프린트를 뜬 이상 감독이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말했던 그는 요즘도 쉽사리 맘을 놓지 못하는 눈치였다. 대담 첫머리에 국내 극장들의 열악한 상영 여건에 대해 한바탕 성토한 그는 여러 차례 “내 영화를 볼수록 부끄러워 죽겠다”고 했다. 대담자가 “<혈의 누>는 요즘 영화들이 갖추지 못한 보기 드문 미덕을 갖고 있다”고 해도 “아직 멀었다”며 겸손의 손사래를 쳤다. 아마 5월9일 개봉을 한 다음에도 그의 소심함은 다음 영화를 내놓기 전까지 계속될 것 같다. “한 장면 한 장면 꼬치꼬치 물어볼까봐 사실 겁났다. 한 차례 기자시사회밖에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웃음) 영화에 관해선 소심하고, 깐깐하고, 고집불통인 김대승 감독과 “<혈의 누>는 역사 미스터리에 멜로를 끼워넣고 그 아래 신랄한 사회비판까지 깔아놓은 정직하고 뚝심있는 영화”라고 평가한 김봉석 영화평론가가 만나 이야길 나눴다.

김봉석 | 프린트를 뜬 뒤에도 여러 차례 영화를 봤을 텐데. 무슨 생각이 들던가.

김대승 | 왜 내가 2.35 대 1로 찍었을까 싶더라. 한국의 극장 환경이 한심한 수준이 아닌가. 좌우가 잘려나가니 프레임 안에 있던 인물이 바깥에서 들어오는 식이 돼버린다. 기술시사하는데 싱크가 안 맞아서 녹음실에 따졌는데 알고 보니 사운드가 16프레임 선행하는 걸 극장쪽에서 모르고 램프를 맞춰놨더라. 디테일한 것이지만 극장 영사기에 따라서 사운드의 하이(high)음이 다 깎여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램프 밝기가 다 다르다보니 인물들의 얼굴색도 제각각이다. 그렇다고 가장 환경이 좋은 극장에 맞춰서 프린트를 뜰 수도 없는 일이고. 국제표준규격을 서둘러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김봉석 |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그런 걸 해야 하는 건데.

김대승 | 심의도 문제다. 요즘은 아비드 편집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비디오테이프로 작업하잖나. 그런데 여전히 필름으로 찍어서 심의 받으라고 한다. 개봉일이 정해져도 감독은 욕심낼 수밖에 없는 게 영화인데 심의에 내기 위해 다 되지도 않은 CG를 출력해서 프린트 뜬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뺏긴다. 심의를 해야겠다면 자기네들이 작업실에 와서 보던가. (웃음)

김봉석 | 사실 외국 가서 영화 보면 분통 터질 때가 있다. 한국에서 볼 때와 완전히 다르니까. 현상도 마찬가지다. 박찬욱 감독, 김지운 감독 등도 LA에서 프린트를 하나 떠왔는데 아주 다른 영화가 됐다고 하더라.

김대승 | 1.85 대 1로 찍었다고 해도 제대로 구현될 것 같지 않다. 어떤 근거인지 모르겠으나 한국 극장의 스크린 가로세로 비율은 2 대 1로 일률적으로 맞춰놓은 것 아닌가 싶다. 좌우를 맞추면 위아래가 잘린다. 위아래를 맞추면 이번엔 좌우가 잘린다. 그나마 오른쪽은 덜 잘린다. 외화 자막 때문에. 자기네가 앵글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서편제> 텔레시네 작업 때 기절할 뻔했는데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앵글을 바꿔버렸다. 그런 무식한 짓이 어딨나 했는데,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김봉석 | 2.35 대 1로 찍은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스크린이 서울에 2군데밖에 없다고 들었다.

김대승 | 기자시사 전에 극장을 멀티플렉스로 바꾸려고 했더니 현상하신 분이 ‘거기는 포커스가 반이 나가요’ 하더라.

“이번 영화는 염치에 관한 이야기다”

김봉석 | <혈의 누>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모두들 좀 의아해했었다. 멜로판타지라 할 수 있는 <번지점프를 하다>로 데뷔한 감독이 미스터리 시대극에 고어장면도 많은 영화를 차기작으로 한다고 하니까.

김대승 |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감독이라면 적절한 의구심이지만 난 이제 영화 2편 만든 신인감독 아닌가. 모색하고 탐색하고 뭐 그런 과정에 있는 건데.

김봉석 | 그런데 <혈의 누>를 보고 나니까 <번지점프를 하다>와 유사성이 보이더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비슷하고 과거를 통해서 현재가 재구성되는 플롯도 그러하고. 처음에 <혈의 누>를 어떤 영화로 만들고 싶었는지가 궁금하다.

김대승 | 닷새간 다섯 인물들이 다섯 가지 방식으로 살해된다는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 그뒤론 그 이야기 안에 어떤 주제를 담을 것인가 고민했다. 전작이 사랑을 지키지 못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번 영화는 염치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려고 했다. 장르적으로 접근하되 그 안에 하고 싶은 다른 이야길 두고 싶었다는 점에서 2편의 영화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전작의 동성애 코드나 이번 영화의 고어장면이나 내가 말하고 싶은 목표지점으로 가기 위한 에스컬레이터 같은 장치들일 뿐이다.

김봉석 | 스릴러라는 장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나.

김대승 | 없었다. 만날 <샤이닝> 이야기 하는 게 사실 그 영화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그쪽 유의 영화들을 별로 본 게 없어서이기도 하다. 사실 청룡열차도 잘 못 탄다. 그래서 지금은 인과관계의 디테일이 중요한 장르인데 만든 영화를 보면 그런 점을 지나치게 쉽게 본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장르에 대한 지식만으로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닌가 자문하고 있다.

김봉석 | 영화 속 시대배경은 조선시대 말기다. 특별히 그 시대에 주목한 이유가 있다면.

김대승 | 처음에 이원재 작가가 쓴 시나리오는 시대적 배경이 조선시대 정조가 승하한 다음이었는데 부가 탐욕을 낳는다는 설정이 재밌었다. 자본이 축적되고 중인계급이 성장하고 동시에 서구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런데 조선은 여전히 비합리적인 가치들이 지배하고. 그런 충돌들을 다룰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과거를 끌어오는 게 과거를 이야기하기 위함은 아니잖나. 현실에 대한 어떤 발언을 하고 싶어서인데. 캐스팅 하는 과정에서 어떤 배우가 양복 입고 싶다면서 구한말로 바꾸면 안 되느냐고 하더라. 그렇게 했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고 본다. 보도자료에 보면 1808년이라고 되어 있긴 한데 영화에 꼭 그 시기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김봉석 | 무당이 굿하는 장면이 처음에 나온다. 그녀의 입을 통해 풀려져 나온 강 객주의 저주는 이 섬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호도한다고 하는 수사관 원규와 봉건시대 비이성과 광기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무당의 갈등은 그러나 영화 후반부로 가면 애매해진다.

김대승 | 제의나 굿이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모두 산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다. 사실 이 섬을 지배하는 광기는 무당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무당은 사람들의 광기를 드러나게 하는 매개이자 때론 원규의 상처를 치유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중립적인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섬 주민들의 광기를 조종하는 건 그들 마음속의 양심없음, 염치없음이지 무당이 아니잖나. 그런 점에서 무당의 역할을 키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김봉석 | 영화의 막바지에 혈우(血雨)가 내리는 장면은 그럼 어떻게 봐야 하나.

김대승 | 염치 이야길 해야 할 것 같다. 한번은 교통사고가 났다. 신호대기 하는데 앞 차가 갑자기 후진해서 내 차를 받은 거다. ‘백미러도 안 보고 이 사람 뭐 하는 거야’ 그랬는데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아, 미안해. 하하. 좀 긁혔네. 칠하면 되겠네’ 하시더라. 그래서 ‘웃지 마세요. 남의 차 받아놓고 재밌으세요?’ 하고 정색하고 말했던 적이 있다. 또 한번은 술 취해서 새벽 4시쯤에 집에 갔는데 엘리베이터가 빨리 안 내려오는 거다. 오줌도 마렵고, 오바이트도 쏠리는데. 한층한층 내려오기에 누가 장난치는구나 싶었다. 신문배달 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는데 말로는 못했지만 속으로 째려봤었다. 그런 짓 하고 나면 며칠을 앓는다. 내가 강자의 입장에서 염치없는 짓을 한 거구나. 그런데 내가 39살 먹기까지 저지른 잘못이 이것뿐이겠나. 마지막 장면에서 내 눈에도, 원규의 눈에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핏빛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염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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