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친구가 왔다. 얼마 정도 뉴욕에서 나와 함께 지낼 예정으로. 그녀와 나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고, 어쩌다 보니 앞뒤 자리에 앉았으며, 우연히도 2학년, 3학년 연달아 같은 반이 되었다. 와중에 몇몇 아이들이 돌려쓰던 교환일기 속 친구가 되었고, 유난히 웃기는 그 녀석 덕에 ‘지옥에서의 한 철’ 속에서도 가끔은 웃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방과 후 교문 앞에서 항시 대기 하고 있는 독서실 봉고를 타고 같은 독서실로 향해 컵라면을 나눠 먹고 몇 시간 자다가 먼저 깨는 사람이 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며 우정을 유지했다. “침 닦아라! 봉고 왔다!”
대학에 진학 한 이후, 일년에 서너 번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해는 한, 두 번쯤 만나면서 ‘친구’라는 이름에 먼지를 터는 사이가 되었다. 뭐, 어릴 적 친구가 늘 그렇듯 1년 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듯 했고, 그간의 소소한 일상이나 연애사 따위는 1,2시간의 속사포 같은 수다 속에 백업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미술을 전공했던 그 친구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지만,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꿈이 좌절된 친구의 고민과는 무관하게 나는 그녀가 누리는 ‘방학’이라는 강력한 ‘한방’ 이 늘 부러웠다. 일년을 꼬박 일해도 일주일 정도의 휴가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녀가 여름 겨울로 누리는 두 어 달의 긴 휴식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십여 년을 강제적으로 출근 당했던 학교라는 무덤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갈 가치가 충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 어제 뉴욕에 왔다. 6년 동안 일하던 학교를 결국 그만 두고서 말이다. “방학 때마다 모아둔 월급으로 여기 저기를 여행했어. 그런데 이상한 게 여행을 떠나는 날부터 늘 돌아올 날만 걱정 하고 있더라.” 그렇게 그녀는 돌아갈 날 걱정 없는 진짜 여행을 위해 ‘죽기 전엔 안 나온다’는 그 안정적 직장을 그만 두었다. 어른들이 듣는다면, 끌끌 혀를 찰 결정이었다. 올 초에 한 후배도 잘 다니던 외국인 회사를 그만 두고 잠시 뉴욕에 왔었다. 회사에서 일괄적으로 ‘싸이’와 ‘메신저’를 차단 한 이후, 갑자기 출구 없는 벽에 선 기분이 되었노라고 한숨지은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취업의 문턱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만 가는 상황에서 실업자들이 듣는다면, 허 참, 기막혀 할 일이다.
알렉산더 페인의 <일렉션>이란 영화에 보면 이런 대화가 나온다. ”모든 걸 잃은 사람에겐 어떤 일이 생길까? 그가 일해왔던 모든 것, 그가 믿었던 모든 것, 집에서도 쫓겨나고 사회로부터도 제명당하면, 그렇다면 어떻게 살수 있을까. 과연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뉴욕이지” “그래, 시대를 거쳐 오랫동안 사람들은 뉴욕을 문제 많은 인생의 도피처로 생각해왔던 것 같아…”
그렇게 오늘도 뉴욕의 거리는 이 도시를 탈출구라고 믿고 입성한 뜨내기들과 그 판타지가 현실이 아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몽상가들과 이 도시의 비정함을 견디지 못한 채 또 다른 도시로의 탈출을 꿈꾸는 루저들로 가득 차 있다.
이스트빌리지의 ‘랜드마크 씨네마’ 에서는 매주 금, 토 자정에 특별상영회를 하는데 지난 주말의 프로그램은 바로 <미드나잇 카우보이>였다. 풍운의 꿈을 안고 뉴욕으로 입성한 조(존 보이트)는 남자에 굶주린 뉴욕여성을 상대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지만, 이 냉정한 도시는 텍사스 촌뜨기의 희망사항에는 영 무관심하다. 그렇게 돈도, 꿈도 바닥이 날 때쯤 조는 한때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절름발이 부랑자 렛쪼(더스틴 호프먼)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점점 겨울로 접어가는 이 꿈의 도시는 이들에게 따뜻한 스프도, 몸을 누일 편안한 침대도, 대가 없는 몇 달러도 쥐어주지 않는다. 목을 조여 오는 빈곤, 꼬이기만 하는 인생. 결국 조는 게이 노인에게 폭력을 행사해 돈을 뺏게 되고, 평소 렛쪼의 소원대로 두 사람은 마이애미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따뜻한 태양이 비치는 그 곳으로 향하며, 카우보이 옷을 벗어 던지는 조는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어오르지만, 폐병으로 고생하던 렛쪼는 미쳐 플로리다에 닿지 못하고 버스 안에서 그 지리한 삶으로부터 영원히 탈출한다.
왜 텍사스의 카우보이는 뉴욕을 꿈꾸고, 뉴욕의 루저는 마이애미를 꿈꾸었던 것일까? 왜 초등학교 교사는 뉴욕을 꿈꾸었고, 뉴욕의 나는 지금 쿠바를 꿈꾸고 있는가. 자꾸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현실을 벗어나고픈, 이 끊임없는 욕구의 파도들. 실연을 주었던 그가 없는 도시로 간다면, 문제로 가득한 그 직장을 그만 둔다면, 불운으로만 가득했던 그 땅을 떠난다면, 그 집착에서도, 그 문제에서도, 그 불행에서도 빠져 나올 것 같은 믿음. 그렇게 사람들은 매일 탈출을 꿈꾼다. 소심한 누군가는 하루 밤의 술기운으로 자위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가까운 바다를 향해 밤새 똥차를 굴린다. 그 중 몇몇은 군대 가는 기차에, 해외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떠나 본 사람들은, 그렇게 돌아와 본 사람들은 안다. 그곳은 탈출구가 아니라 또 다른 방으로 가기 위한 통로일 뿐이란 사실을.
어쩌면 나 역시 이 도시를, 뉴욕을, 나의 트러블 가득한 삶의 탈출구로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는 어디라도 떠나고 싶을 만큼 지쳤고, 어디를 가도 여기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이 뉴욕행을 결심한 절대 이유는 아니었지만, 잠재의식 밑바닥에 그런 이유가 없었다고 부정 할 순 없다. 그렇게 뉴욕에 왔고, 이곳의 4계절을 모두 보고야 말았다. 모든 것이 즐거워만 보이는 이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어쩌면 나는 문제 많고 골치 아픈, 그래서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관계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도피해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고, 나도 누구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균실에 살고 있는 나는, 안전하지만 그만큼 외롭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도 많은 이들이 무균실로의 탈출을 꿈꾼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도피처에서의 휴식은 잠시뿐이다. 언젠가 문을 열고 그 오물투성이 세상에 몸을 비비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 이 방으로 들어가기 전 벗어놓은 무거운 짐짝들이 떡 하니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더 무거워 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살아가기 위해선, 다음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선 그것들을 다시 짊어질 수밖에 없다. 버릴 곳도, 숨길 곳도, 도망 갈 곳도 없다. 영원히 잠들지 않는 한, 이 삶에는 탈출구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