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5일, <씨네21> 창간 10주년 기념 영화제가 끝났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6천명 이상이 이번 영화제를 다녀갔다.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영화를 못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었다. 극장에 못 들어간 사람들이 내 멱살을 잡는 꿈을 꾼 적도 있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번 영화제는 최근 몇년간 허리우드극장이 경험 못한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성황을 이뤘지만 매진은 딱 한번 나왔다. 지난 4월30일, 갑자기 한여름처럼 더웠던 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상영시간이었다.
당일 현장에 없었던 탓에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이날 극장 환경은 끔찍했단다. 이른 더위에 무방비 상태였던 터라 에어컨은 작동이 안 됐고 때마침 매표시스템도 장애를 일으켰다. <안녕, 프란체스카>의 박희진 말투로 “아니, 이게 웬 당황스런 시추에이션”. 480석 좌석이 완전 매진된 상태에서 바닥에 앉아서라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보고야 말겠다는 사람들로 가득 차 극장 안의 열기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한 관객이 “대만의 더운 여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관람이었다”고 인터넷에 적은 글을 보니 어느 정도 상상이 갔다. 그런 찜통 같은 곳에서 4시간짜리 영화를 숨죽이고 지켜봤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증언에 따르면 딱 1명만 중간에 나갔고 나머지는 미동도 않고 끝까지 봤단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그런 인내심에 값하는 영화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씨네21> 홈페이지에 이날 관객 가운데 한분이 불만을 토로하는 독자엽서를 올려놓았다. 당연한 불만이고 다시 한번 죄송스런 마음을 전한다. 이 독자엽서를 보면서 앞으로 엄청난 항의가 밀려들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그러나 더이상 항의는 없었다. 예기치 못한 사고라는 걸 십분 이해하는 듯한 반응을 보면서 왠지 가슴이 뿌듯해졌다. 우리는 참 좋은 독자들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그건 <씨네21>에 대한 여러분의 신뢰이기도 하겠지만 영화에 대한 여러분의 애정이기도 하다.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불편함이나 손해를 감수할 수 있다는 태도, 그건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제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찬 자리라 흥겹고 신난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일은 웬만한 희생을 달게 받아들이게 한다. 새벽 4시에 갑자기 두눈이 말똥말똥해져서 챔피언스리그 4강전 경기를 본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다음날 출근해서 마감할 걱정 때문에 지금 자야 하는데 미쳤어, 미쳤어, 하면서도 경기 초반 박지성의 골이 들어가는 걸 보자 끝까지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3 대 1로 이기고도 결승 진출에 실패한 극적인 결말, 그걸 보고나니 동틀 때 눈을 감았건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축구 보느라 잠 못 잔 걸 희생이라고? 어이구,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석학이 됐겠네, 라는 면박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도 나는 그런 자발성이 세상을 견디는 힘이라고 믿는다. 영화광이건, 드라마광이건, 축구광이건 뭔가 열광할 만한 게 있을 때 자신의 삶도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다시 한번 <안녕, 프란체스카>를 빌리면, 반장 아줌마, 그러니까 만날 TV드라마만 보는 백수 아들 너무 구박하지 마요. 그러다 신정구 작가처럼 될지 누가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