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적은 여성이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들을 보면 누가 만들어냈는지도 모를 이 말이 실감이 난다.
에스비에스 월화 드라마 <불량주부>에서의 ‘은미’를 비롯해 문화방송 수목 드라마 <신입사원>에서의 ‘현아’, 그리고 한국방송 일일 드라마 <어여쁜 당신>에서의 ‘희주’가 바로 같은 여성이면서 여성을 괴롭히는 적들이다.
<불량주부>에서 미나의 직장동료 은미(강정화)는 도대체 왜 직장을 다니는지 의아심이 들 정도로 회사 일을 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고, 오로지 미나를 괴롭히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것처럼 묘사된다. 은미는 자신이 마음에 둔 회사 기획실장 선우(조연우)가 미나에게 관심을 보이자, 사사건건 미나에게 트집을 잡고 다른 동료들을 부추겨 미나를 따돌린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이런 은미의 모습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직장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신입사원>에서 엘케이그룹 회장의 딸 현아(이소연)도 아버지의 ‘빽’으로 입사한 뒤 엘리트 사원 봉삼(오지호)을 사이에 두고 회사 동료인 미옥(한가인)과 연적 관계를 이루며 미옥을 괴롭힌다. 일류대를 졸업하고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현아는 미옥이 상고를 졸업한 사실을 들먹이며 무시하고, 계약직인 미옥이 재계약을 못해 퇴사하도록 일을 꾸민다. 그런데도 봉삼과의 관계가 잘 풀리지 않자 바로 사표를 던져버린다. 대기업에 취직한 해외유학파 여성이 직장에서의 남자 문제 때문에 그리 쉽게 사표를 낸다는 게 이해가 잘 가질 않는다. 현아 역시 드라마를 보는 이들에게 여성은 직장생활도 취미처럼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
<어여쁜 당신>에서 인영(이보영)의 남편 기준(김승수)을 잊지 못하는 희주(오주은)는 거의 스토커 수준이다. 기준을 출장지까지 쫓아가는가 하면 이미 결혼한 옛 애인의 집을 제집 드나들 듯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여성에게 빼앗긴 희주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남의 남편을 계속 따라다니는 희주의 행동은 상식을 넘어선 것으로 인영을 고통스럽게 한다. 희주 역시 ‘여성=비이성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주는 대표적 인물로 꼽을 만하다.
남녀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설정 만큼 시청률을 높이는 데 좋은 모티브도 없을 것이다. 삼각관계의 한 축을 형성하는 악녀는 당당한 커리어 우먼이거나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음모를 꾸미고 사건을 일으키며 드라마의 갈등을 만든다. 시청자는 여주인공이 어떻게 위기에서 벗어날까 궁금해하며 드라마를 지켜보는 것이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이런 여성들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보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부정적 의식을 내면화할 수 있다. 드라마의 특성상 시청자는 현실세계에서 드라마 속 허구세계로 빨려들어가게 돼 드라마 속의 가치관과 규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여성인 드라마 작가들이 이런 점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극본을 쓰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