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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영화 기행: 타이 [6] - 펜엑 라타나루앙 인터뷰
이영진 2005-05-10

“<올드보이> 보고 강혜정을 캐스팅했다”

5번째 장편 <보이지 않는 물결> 촬영 중인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은 펜엑 라타나루앙(43)의 필모그래피에서 변곡점 같은 영화다. <펀 바 가라오케> <69> 등이 로테르담, 베를린 등에 소개되면서 한때 ‘타이의 타란티노’라 불렸던 그는 타이 서민들이 즐겨 듣는 룩퉁 뮤직을 뼈대로 한 영화 <몬락 트랜지스터>로 잠시 휴식을 취하더니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에서 재기발랄함을 완전히 버렸다. 대신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두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정적인 화면에 깊이있게 담아냈다. 전작들에 비해 “더 느리고, 더 조용하고, 더 황폐하고, 더 신비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 영화는 크리스토퍼 도일, 아사노 다다노부와의 협업의 결과물이었다. 2월24일 촬영을 시작한 펜엑 라타나루앙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보이지 않는 물결>(Invisible Waves) 또한 전작처럼 다국적 편대의 공동작업. 방콕 도착 전날 “내일이 아니면 시간을 내줄 수 없다”는 전갈을 보낼 정도로 크랭크인 준비에 정신없던 그를 만나 바쁜 시간을 뺏었다(참고로 이 영화는 4월19일 촬영을 마쳤다).

-아사노 다다노부가 이번 영화에도 출연한다.

=개인적으로 친한 관계이긴 하지만 시나리오를 주고 출연해라, 그럴 정도는 아니다. 일은 일이니까. 게다가 그는 나처럼 몇년에 한번씩 영화를 찍는 게 아니잖나. 프랍다 윤의 시나리오를 보고, 자연스럽게 아사노 다다노부를 떠올렸고, 다행히 그가 하겠다는 응답을 해왔다. 그는 현장에서 누구에게 일일이 지시받는 것을 싫어한다. 나 또한 그렇고. 둘 다 독립적인 성향인데 지난번에 그가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관객처럼 즐거움을 만끽했다. 단, 만족스러웠으나 끝을 본 것 같지 않았었다.

-그가 맡게 된 요리사 교지는 어떤 인물인가.

=홍콩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일본 요리사다. 그는 사장의 아내와 애정행각을 벌이는데 이 사실을 들킨다. 이 일로 사장은 그에게 부인을 살해하라고 지시하고 일정의 돈을 주고 도피하라고 한다. 타이로 향하는 크루즈에 몸을 실은 교지는 그곳에서 우연히 한국인 여성을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빠져든다는 줄거리다. 영화는 어떤 선택으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한 겁쟁이 남자의 죄의식과 심리를 뒤쫓는다.

-한국인 여성으로 강혜정을 캐스팅한 이유가 있다면.

=누군가 제안을 해왔는데, 마침 <올드보이>를 본 뒤라 쉽게 결정했다. 전부터 그녀는 아사노 다다노부와 함께 작업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안다. 나랑 일하고 싶은 건 아니었겠지. (웃음) 처음 봤을 때, 슬퍼보이는 그녀의 외양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가기를 더 좋아하고, 그곳에서 보는 슬픈 여인들의 모습에 본성적으로 끌리는 편이다.

-이번 영화를 클래식 스릴러라고 표현했다.

=시작하자마자 사람이 하나 살해당하고 누가 죽였을까, 감독과 관객의 뻔한 속고 속임이 계속되는 스릴러를 보는 게 지겹다. 내 영화는 할리우드 고전 누아르에 가깝다. 초반에 누가 사장의 부인을 죽였는지 보여준다. 영화는 어쩌다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상황에 의해 범죄자로 내몰린 한 남자의 심리에 포커스를 맞춘다. <제3의 사나이> <이중배상> 같은 영화들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 영화들을 보면 주인공은 어떤 선택을 함으로써 이미 결과가 결정된다. 어떤 선택에 따라 메인 요리가 나오고 디저트가 결정되는 것처럼. 플롯은 그런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 다만, 고전 누아르를 보면서 저 순간에 주인공이 저렇게 선택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궁금증을 가진 적이 있는데, 이번 영화에선 그런 호기심을 풀어볼 것이다.

-당신의 영화에서 유머는 점점 사라진다.

=맞다. 이번에도 되도록 없이 가려고 한다. 내 안의 유머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나보고 재밌는 놈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난 그 반대다. 바에 갈 때에도 슬픈 음악이 흐르고, 어두운 곳을 찾는다. 시끄럽고 경쾌한 음악이 나오는 바에서 사람들의 밝고 환한 모습들을 보면 왠지 가식 같다.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과 이번 영화는 작업 방식이 비슷하다.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

=재미없는 영화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웃음) 영화가 좋은 게 우리의 삶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것 아닌가. 급하게 얘기를 풀어나갈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살면서 실제로 그다지 큰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잖은가. 일상의 기분과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고 싶을 따름이다. 다만 이번 영화는 전작에 비하면 과장된 느낌이 들 것이다. 더 영화적이라고 해야 할까.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에서 두 남녀는 굳이 대화하지 않더라도 교감이 느껴진다. 단적으로 식사하는 장면을 보면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에 빚진 바가 큰 것 같은데.

=나도 그런 그림이 나올 거라고 생각 못했다. 단지 어색한 남녀 관계를 표현하려고 했을 뿐이다. 다른 촬영감독이었다면 이런 화면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싶다. 서로에게 닿을 듯 말 듯한 두 사람의 감정 표현이 만족스럽다.

-요즘 당신의 영화들을 두고 왕가위와 짐 자무시의 중간 느낌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동의는 하지 않지만 론 하워드와 조엘 슈마허의 중간이라고 하는 거보다 낫지 않나.

-당신의 인물들은 방콕에 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무국적에 가깝다.

=나는 방콕에서 자랐지만 딱히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친구가 적은데다 타이인 친구는 더군다나 적은 편이다. 몰려다니는 타이 사람들하고 다르다. 프랍다만 하더라도 어느 날 만나서 이런 영화를 하고 싶다고 얘기를 하면, 그뒤로 석달간 아무런 연락없이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 시나리오를 던져주는 식이다. 크리스도, 아사노도 다 그런 친구들이다. 그래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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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이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