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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을 비판한다 [5] - 이충걸
정리 이종도 2005-05-10

무뎌진 날을 다시 세워라

초심의 기개를 잃어버린 <씨네21>을 비판한다

한때 대한민국에 영화 주간지가 다섯개나 서식했던 시절이 있었다. 전세계를 탈탈 털어 영화 주간지가 발행되고 시장에서의 입지 또한 굳건한 나라는 라식수술을 두번 했대도 찾을 수 없으니, 그들의 번성은 자체로도 경이였다. 그때 ‘생각있는’ 자들에게 <씨네21>만큼 강박적인 텍스트도 없었다. 온갖 문화적 레시피를 곁들인 이 매체를 통과하지 않고는 동시대의 ‘앞선 벗’도 온전한 ‘시민’도 될 수 없었다.

<씨네21>의 10년은 권세가로서의 시간이기도 했다. 창간 즈음과 한국 영화산업의 고속 성장이 같은 좌표를 그리고, 영화산업의 영역들이 <씨네21>을 주요 저널로 인식하면서 화학작용이 일어났다. 좌파적 문화잡지가 진보적 무엇인 영화와 융합되자 단숨에 문화권력자의 면류관을 쓴 것이다. 일개 잡지가 영화정보의 매개체 역할뿐 아니라 ‘저널’로서의 방향성과 표표함까지 보여줄 수 있다는 걸 누군들 몽상이나 했을까. 영화 비즈니스에 세운 ‘산업적’ 공덕 또한 혁혁한 것이었다. 대중지면서도 미국의 <버라이어티>나 <할리우드 리포터> 같은 영화 산업지류의 성격을 고수한 것도 그 맥락일 터다. 그러나 언론이 권력을 얻게 되자 또 다른 레테르를 달게 되었다. 이른바 ‘영화판의 <조선일보>’라는 관용구이다.

영화지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리뷰의 세기(細技)이다. 초기 <씨네21>은 과연 젊은 매체의 정직으로 충만했었다. 어떤 영화에조차 호오(好惡)를 명백하게 밝혔으며 영화사와 척지는 것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세월은 소금도 쉬게 만드니 절대불변이라 믿었던 <씨네21>의 충절도 부식되었다. 영화산업과 관계를 맺으며 서로 윈윈하는 방식에 원숙해지면서 칼 대신 보습을 택한 것이다.

영향력의 더러운 점은 힘이 커질수록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영화사나 감독이 이번만 만들고 끝낼 건 아니니까 독하게 써서 좋을 게 없지, 그러니 다음을 생각해 ‘구슬리’자는 식 말이다. 급기야 모든 한국영화가 (완성되지도 않은 영화조차) ‘수작’이 되고 만다. 완성까지의 과정이 고단했으므로, 또한 이 시대에 시도되기 힘든 작품이므로 봐줘야 한다는 긍휼함이 만개하는 것이다. 마치 한국영화가 잘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영화저널의 역할이라고 믿기라도 한 것처럼. <씨네21>의 ‘기지’는 이때 발휘된다. <씨네21>의 리뷰는 영화 개봉 뒤에 실린다. 예를 들어 <달콤한 인생>이나 <주먹이 운다>의 개봉 전엔 촬영과정이며 제작노트며 배우 인터뷰며 거하게 밥상을 차렸지만, 그때까지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다 개봉 뒤 평론가의 입을 빌려 ‘영화지로서’ 영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다. 이미 평가가 내려진 다음 리뷰를 쓰는 안전한 시점(時點)은 분명 충무로와의 근거리 유지를 위해 유용하겠지만 정공법은 아니다.

영화계의 대소사를 다루는 시각 또한 저널의 중립이 아닌 영화계에 치우쳐 있다. 스크린쿼터에 관한 지사적 일관성도 그렇다. <씨네21>은 스크린쿼터에 대한 다른 관점엔 관심이 없다. 오직 스크린쿼터를 유지하는 것만이 한국영화에 이로운 것이라는 신념을 굳게 고수함으로써 ‘영화 선전지적’ 태도를 마다지 않는다. 차라리 충무로가 우군이라고 공공연히 시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씨네21>은 영화 관계자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잡지가 아니며 독자 또한 죄다 영화 관계자들은 아니다.

<씨네21>은 <한겨레>의 뿌리로부터 출발했다. <씨네21>의 정체성이란 단지 취향을 다루는 영화잡지가 아닌 정치적 성분도 투사하는 시사 문화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변화라는 기치를 드높은 창공 위에 내걸었다 한들 편집디자인에 관한 한 결코 당대적이지 않다. ‘똥배’가 보이는, 앞길 창창한 한 여배우의 커버사진의 경우처럼 기초적 세부에 소홀한, 솔직히 촌스럽다 아니하진 못할 보도풍 커버 사진들로는 결코 진보라 스스로 주창하진 못할 것이다.

<씨네21>의 공헌자들 가운데는 ‘한낱’ 에디터들의 이름이 더불어 우뚝하다. 조선희와 김영진의 평론, 조종국의 영화산업 기사, 올라운드 플레이어 남동철의 피처 기사, 영화보다 더 아름다웠던 김혜리의 영화 소개기사로 두둑했던 90년대 후반 <씨네21>의 라인업은, 그때의 구력을 유지하고 있으되 예각이 무뎌진 지금 회고조로 돌아보게 만든다.

10년 전엔 영화에 대한 지적인 소비가 있었다. 어쨌든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 10만 관객이 들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세태가 달라졌으니 영화는 가장 세속적이고도 상업적인 첨병이 되고 말았다. 영화지의 전성기가 지나자 영화의‘고결함’이 붕괴된 건 그야말로 역설이다. 그러나 나는 청빈한 기개로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중심을 유영해갔던 <씨네21>의 출발을 기억한다. <한겨레>가 신문의 핵심인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 관해 결코 조중동을 극복하지 못하던 시절, <씨네21>을 창간함으로써 주류 보수진영에 문화적으로 ‘항전’했던 그 신념 말이다. 그러므로 ‘더 팔아야 하는’ 생존의 명분을 백분 이해하되, 이를테면 강우석을 비판하던 벼린 전투력을 잃고 ‘제목 장사’를 하거나 가을영화 프리뷰 같은 지루한 기획에 지면을 바치는 걸 보면 강남에 아파트를 장만한 시인 앞에서처럼(그게 결코 허물할 일은 아니건만) 영 속이 불편해지고마는 것이다.

<씨네21>은 늘 적자(嫡子)의 책임에 관해 숙고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영화지 시대를 연 것도 <씨네21>이었고, 언젠가 영화지 시대에 종말을 고할 것도 <씨네21>일 테니까.

이충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