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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 제작기 [2] - 한국 스탭 vs 뉴질랜드 스탭
정리 오정연 2005-05-10

눈물은 만국공용어?

6월25일/ 마운틴 라이포드

촬영을 끝내고 장비를 정리 중인 스탭들.

<올드보이>의 마지막 장면을 비롯해서 전지현이 나오는 디카 광고까지 찍었다는 마운틴 라이포드. 마지막 헌팅 때까지만 해도 완벽한 설산이었던 곳이 눈이 다 녹아서 민둥산이 되어 있다. 팀의 막내인 민재가 리더인 도형의 엄청난 과거를 알게 되고, 근찬의 발은 동상으로 썩어들어가는 등 대원들이 점점 심리적·육체적 한계에 도달하는 듀피크 정상을 찍어야 하는 곳인데, 아무래도 원하는 풍경을 찾기 힘들어 보인다. 대안이라면 산자락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방법 정도? 그러나 뉴질랜드 스탭들은 여건상 촬영이 어렵다며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따져묻자, 침착한 대답이 돌아온다. 장비의 이동과 전력문제. <태극기 휘날리며> 조연출 출신인 조감독 환희는 강원도 산꼭대기까지 수많은 짐을 지고 올라가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는데, 운동을 그렇게 싫어하는 나조차 직접 옮길 수 있을 정도의 짐이건만 헬기를 불러야 한다는 거다. 전력 또한 마찬가지. 한국에선 발전차가 터져라 전력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건만, 이들은 규정 전압이 오버되면 안 된다는 말만을 반복한다. 도대체 영화를 찍으란 거야, 말란 거야. 예상은 했지만 뉴질랜드 스탭과 한국 스탭은 너무 다르다. 과정과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태도가, 오로지 좋은 결과만을 위해 미쳐 있는 나의 열의와 부딪힌 것이다. 정정훈 촬영 감독이 침착하지만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뉴질랜드 방식, 한국 방식 이런 것이 뭐 중요하냐? 우린 그저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여기 모인 게 아니냐?!” 통역하던 뉴질랜드 코디네이터 원조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뉴질랜드 동포 출신 촬영 스탭 동원이 나섰다가 또 울고, 통역을 담당했던 연출부까지 나섰으나 울먹이고. 결국 우리의 희망, 임희철 PD의 다소 엉뚱한 통역으로 눈물바다는 수습이 됐다. 어쨌거나 몇몇 키위들도 눈시울이 붉어졌고, 앞으로는 최선을 다하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촬영이 끝난 뒤. 한국과 뉴질랜드 스탭들이 처음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맥주를 기울였다. 나는 이 영화를 준비해왔던 5년을 얘기하며, 뉴질랜드가 있었기 때문에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당신들에겐 하나의 일에 불과하지만 나에겐 엄청난 일임을 강조하면서. 물론 나중엔 이 얘기도 너무 반복하다보니 “니가 5년을 준비했든 말든∼” 이런 분위기가 돼버렸다.

해 지기 전, 나는 헐크로 변한다

7월28일/ 다시 스노팜

강풍기로 연출한 블리자드신.

김성수 감독이 <무사>를 찍을 무렵 헐크로 변신했던 일화를 들었을 땐, 도대체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돌변하는 건지 궁금했었는데, 이젠 알겠다. 해가 지면 촬영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요즘은 해지기 전 30분 동안 매일매일이 그렇다. 뉴질랜드 스탭들도 그때만 되면 “빨리빨리”, 심지어는 “절라 빨리”라고 외치며 돌아다닐 정도. 하지만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했던 상황은 없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런 경우는 없다구∼!!” 나도 모르게 뉴질랜드 제작실장에게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사태는 이렇다. 오전부터 안전요원 롤프는 눈폭풍이 올 거란 예보를 했고, 스탭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는 제작진에게 마지막 경고를 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간 실제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화이트아웃 상황에서도 촬영을 하지 않았던가. 한달 가까이 눈밭에서 작업한 감으로 미루어, 촬영을 철수할 정도의 극한 상황을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롤프는 마지막 경고 이후 10분 뒤, “어찌됐던 우리는 철수할거야!”라며 뉴질랜드 스탭들에게 철수를 종용했고, 그들은 신성한 카메라를 감독이나 촬영감독의 동의없이 해체하기 시작했다. 제작실장 해리는 특유의 빠른 어투로 스탭들의 안전에 관한 절대권한이 안전요원에게 있다는 얘기를 되풀이하며 진정하란다. 아마 뉴질랜드 스탭들은 내가 자기네들을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위기상황이라 해도 이러면 안 되는 거다. 우리는 벌써 많은 고비를 넘어온 한팀인데. 눈이 전부 녹아버린 마운틴 라이포드에서 10시간 이상씩 차를 몰아 스탭 대이동을 해야 했던 때에도,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하루에 네번씩 촬영셋업을 바꾸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어두컴컴한 새벽 4시에 일어나 1시간씩 걸리는 촬영장까지 위험한 행진을 거듭하면서도 우리는 웃으며 작업하지 않았던가.

나는 뉴질랜드 라인 PD 브리짓에게, 롤프의 공식적인 사과와 해명 없이는 남은 기간 그와 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결국 사태는 롤프의 공식적인 사과와 화합의 술자리로 봉합됐지만 왠지 우울하다. 그러나 석양의 스노팜은 여전히 아름답다. 어디를 바라봐도 달력처럼 끝내주는 절경이 펼쳐져 있지만, 한달 내내 바라보고 있자니 미쳐버릴 것만 같다.

3일치를 하루에 찍어낸 촬영의 기쁨

8월19일/ 마운틴 가비

헬기로 30분이나 날아가야 하는 곳, 마운틴 가비. 3년 전 뉴질랜드 첫 헌팅 때부터 찍어놓았던 곳으로,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의 지평선만이 시야에 가득한, 남극 그 자체다. 대원들이 그처럼 도달하려고 했던 도달불능점에서 민재가 홀로 헤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중 낮신 모두를 이곳에서 찍어야 한다. 3일에 걸쳐 40여컷을 찍어야 하는 일정이지만, 헬기 수용인원 문제와 국유지라는 조건 때문에 꼭 필요한 스탭 20명만이 촬영에 임할 수 있다. 그 이상은 아무도 데려올 수 없다더니, 하늘에서 이동식 화장실이 내려오는 건 여전하다. 그 헬기에 메이킹이나 스틸 기사 좀 태워오면 어디가 덧나나. 그런데 이상하다. 평소의 1/3 규모밖에 안 되는 스탭들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날씨 속에서 촬영하는 급박한 순간에 오히려 속도가 붙는다. 지태는 어렵지 않게 감정의 최적 상태를 찾아낸다. 정 기사님을 비롯한 모든 스탭들이 최고의 테이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렇다. 이건 그동안 잃어버렸던 어떤 느낌, 네편의 단편을 만들며 느꼈던 신명나는 촬영의 기쁨인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CG컷을 위한 매트 촬영도, 강풍기도, 제설기도 없다. 모든 건 현실 그대로 찍혀져 필름에 기록된다. 결국 기적이 일어나, 3일 동안 찍을 분량을 하루 만에 마쳤다. 항상 촬영 속도가 늦다고 제작부에게 한마디씩 들었는데, 이제야 내 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헬기 수송 인원 때문에 한두명씩 땅으로 떠나가기 시작한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 주변을 둘러보자 채 다섯명도 안 되는 스탭들이 남아 있다. 촬영 퍼스트가 저 멀리서 CG에 합성될 화면을 외롭게 촬영 중이다. 이윽고 석양이 오고, 우리는 어쩌면 관객이 이 영화에서 영원히 기억할 몇 개의 이미지를 촬영한다.

돌아오는 헬기 안. 마치 꿈속을 부유하는 기분이다. 스탭들을 다그치기 위해 고함을 질러댔던 기억도, 나를 이기지 못해 하루 종일 짜증이 났던 어떤 날도, 사소한 오해들로 마음이 무거웠던 몇몇 사태들도, 피곤에 곯아떨어진 어린 연출부들을 막막하게 바라봐야 했던 순간들도, 모두 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일이 아무리 힘들어져도 오늘은 한잔 마셔야겠다.

<남극일기> 스탭들 면모

격돌! 한국 스탭 vs 뉴질랜드 스탭

촬영감독 정정훈

<올드보이>의 촬영감독으로 뉴질랜드 로케이션은 두 번째. 일명 구라정. 아역배우 출신다운 넘치는 끼의 소유자로 “내 카메라는 연기를 한다. 카메라로 못다한 꿈을 이루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자신의 신체 일부가 찍힐 수 있는 기회라면 아무리 사소한 숏이라도 놓치지 않는다. 이번에도 대원 중 한명이 가족사진을 바라보는 시점숏에서 사진을 잡은 손으로 출연했다. “아직도 메소드가 살아 있구나!”라며 흐뭇해했다는 후문.

로케이션 매니저 해리 화이트허스트

1988년작 <윌로우>로 영화를 시작하여 <반지의 제왕> 시리즈, <실비아> 등을 함께한 쟁쟁한 경력자. 일명 크레이지 해리. 영국 맨체스터 출신으로 뉴질랜드 전문가가 된 그에게 현지에서도 “이상한 사람”으로 통한다.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키지만 설경 섭외에 관해서는 최고의 로케이션 매니저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작업을 맡길 수밖에 없다고. 100여편의 CF에 참여하여, 한국 CF 관계자 중에도 아는 사람이 제법 있다.

PA(Production Assistant) 정원조

경영학과 법학을 복수전공했고, 한·뉴질랜드 정상회담 당시 통역으로 참석하기도 한 천재소년. 2001년 <남극일기>의 첫 헌팅 때 섭외가 된 인연으로, 보장된 미래를 제쳐두고 4년이라는 기간을 <남극일기>와 함께하며 한국 스탭과 뉴질랜드 스탭 사이의 의사소통을 도왔다. 그간 영화에 맛을 들여 직접 단편작업을 진행한 뒤, 임 감독에게 보여줬으나 별 칭찬은 듣지 못한 모양. 미묘한 뉘앙스까지 살려내는 맛깔스런 통역으로 한국·뉴질랜드 스탭에게 고른 신뢰를 받았다. 4년 전에는 제법 상큼한 외모의 소유자였으나, <남극일기> 촬영 당시에는 숙소에서 내복 차림으로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등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안전요원 및 의료 롤프 Crausaz

산을 좋아해서 이 산 저 산 떠돌다가 영화제작팀의 안전요원으로 정착한 스위스 출신 사나이. 일을 잘하고 위급상황을 예견하는 능력이 뛰어나 뉴질랜드 스탭들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최정예 스탭만이 합류할 수 있었던 마운틴 가비에서의 촬영시 남들 열심히 촬영하는 동안 손수 이글루를 만드는 진풍경을 연출한 바 있다.

프로듀서 임희철

‘내추럴 본 PD’. <유령> <화산고> 등 어렵다고 소문난 영화를 제작하면서, 화려한 언변이나 논리적 사고보다는 본능적인 직감으로 위기를 대처해왔다. 현장에서 그의 얼굴이 얼마나 빨개졌는지를 살피면, 대강의 진행 상황과 상태를 알 수 있다. 불과 5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임필성 감독과 함께 임브러더스로 불리는 것을 즐긴다. 액션영화를 작업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촬영장에서는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조언자가 되어주었다.

특수효과 슈퍼바이저 제프 커티스

<반지의 제왕> <라스트 사무라이> <킹콩> 등의 특수효과를 담당했다. 뉴질랜드 스탭들과의 문제로 임필성 감독이 힘들어할 때, 영화의 편이 되어준 든든한 사나이. 블리자드 시퀀스는 그의 공이 컸다. 영화 내내 함께했던 데몰리션의 박경수 팀장에게 뉴질랜드에서 일해볼 생각이 없냐며 스카우트 제의를 하기도 했다. 언제나 딸들 자랑으로 여념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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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필성/ 감독·사진제공 싸이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