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의 소재로 익숙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알츠하이머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의 재료로 변신한다. 게다가 문제의 병은 피해자가 아니라 결정적 단서를 지닌 증인, 혹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에게 주어진다.
백발백중의 노련한 청부살인업자 안젤로(얀 디클레어)는 이른 시일 안에 은퇴를 계획하고 있다. 이유는 유전인 알츠하이머 증세 때문. 그는 <메멘토>의 레너드처럼 팔뚝에 단기목표를 메모하는 등 마지막 프로젝트를 제대로 완수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목표가 어린 소녀임을 알게 된 뒤 임무를 거절하고, 이후 알 수 없는 함정에 빠져들어간다. 한편 강력반 형사 빙케(코엔 드 보브)와 프레디(베르너이 디 스매트)는 미성년자 매춘사건에 관련된 소녀를 포함해서 4명이 희생된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영화가 중반으로 접어들면 안젤로와 빙케, 프레디는 각자의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위층까지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안젤로는 때때로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혹은 저지르지 않았는지) 기억할 수 없는 병에 시달리고 있고, 빙케는 사건의 열쇠를 쥔 것으로 보이는 안젤로를 점점 신뢰하게 되지만 주위에선 그런 그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영화의 백미는 가족영화 속 인자한 할아버지로 제격일 것 같은 얀 디클레어가 연기하는 안젤로의 모습. 그는 조금만 뛰어도 가쁜숨을 몰아쉬어야 하는 고령이지만, 오랜 경험을 토대로 팔팔한 장정 몇명을 혼자서 처치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고를 증명할 증거를 어디에 보관했는지를 잊어버리고도 “미안하네. 기억이 돌아오겠지”라며 짐짓 태평스러운 그 태도는, 현실적이고 매력적이다. 덕분에 안젤로와 빙케의 관계 역시, 형사와 범인 사이의 미묘한 교감이라는 흔한 설정보다 흥미롭게 다가온다. 오늘내일하는 병세에도 믿을 수 없는 순발력과 괴력을 선보이는 안젤로의 후반부 모습은 다소 좀비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만.
스릴러의 전제와 공식을 조금씩 뒤틀고 변주하는 <알츠하이머 케이스>의 영상은 감각적이다. TV시리즈를 연출한 전력이 있는 에릭 반 루이 감독은 뮤직비디오의 호흡으로 긴박한 도입부를 처리하는 등 익숙한 비주얼을 적당한 균형감각으로 영화에 도입한다. 그러나 장르의 변형 혹은 알츠하이머라는 독특한 소재에 몰두한 나머지 후반부 내러티브의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매끄러운 영화의 표면 역시 힘을 잃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