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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환경파괴의 연대기,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너구리의 눈으로 본 환경파괴와 인간의 조건

‘뉴타운 프로젝트’로 도쿄 근교가 개발되기 시작하던 폼포코 31년. 숲이 점점 줄어들면서 살 곳이 없어지자 너구리들이 대책회의를 시작한다. 긴 회의 끝에 너구리들은 인간을 알기 위한 ‘인간연구 5개년 계획’을 시작하고, 한동안 금지되었던 변신학을 되살리기로 한다. 한편 시고쿠와 사도의 너구리 장로들에게도 도움을 청한다. 너구리들은 변신술을 이용하여 각종 사고를 일으키고, 귀신 소동을 일으켜 잠시 차질을 빚는 것은 성공하지만 인간의 개발 전체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너구리는 그대로 멸망해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 세계의 틈바구니 어딘가에서 숨어지낼 것인가.

다카하다 이사오는 현실주의자를 자처한다. 이상주의자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근원적인 문제를 끌어안고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반대로, 다카하다 이사오는 초현실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들여 풍자하며 한바탕 굿잔치를 벌인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세계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을 그대로 그려내고 풍자한다.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개발은, 필연적으로 자연을 위협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노노케 히메>에서 말하듯이 인간과 자연의 생존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모순된 상황에서 <모노노케 히메>의 주인공들은 삶의 길을 택한다. 너구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멸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변신술로 인간에게 위협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안 너구리들은 인간을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햄버거는 레몬티는 어쩌지? 라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그리고 동의한다. 인간을 조금은 살려두자고. 그 풍자가 바로 다카하다 이사오가 추구하는 것이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비극적인 환경파괴의 연대기이자, 거기에 맞서 싸운 너구리들의 투쟁사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전통적인 만화 기법과 유희정신으로 이 고난의 연대기를 장쾌하게 써내려간다. 능글맞은 내레이션이 흐르면서, 너구리들의 낙천전인 생활들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너구리들은 두발로 서서 다니고,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모습이 변하기도 한다. 변신 여우들은 긴자에서 고급 술집을 열어 인간을 홀리는가 하면, 아직 자연의 힘이 강한 시고쿠에서 너구리들은 신사의 신으로 존경받고 있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하며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상주의로는 포섭하기 힘든 현실의 추레함들마저 다카하다 이사오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는 푸근한 서민적인 정서로 되살아난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화사하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서민적이고 정겨운 서정이 가득 담긴 애니메이션이다.

생존을 위해 개발을 하지만, 우리는 자연의 중요성도 알고 있다. 그래서 적당히 살려둔다. 다만 인간의 이익이 침해받지 않는 정도에서. 그러나 인간의 자비라는 것은, 너구리에게는 결국 패배다. 너구리는 맞서 싸우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변신술뿐이다. 아무리 겁을 주고 소동을 일으켜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너구리들도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각자의 삶을 택해야만 한다. 변신 너구리는 변신술로 인간 사이에서 살아가고, 변신하지 못하는 너구리들은 또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간다. 너구리의 낙천성을 잃지 않고.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흥겨운 풍자와 익살이 가득하다. 너구리들이 연애를 하는 장면이나 인간으로 둔갑한 너구리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 너구리들의 회의를 묘사하는 장면 등에서는 재기가 빛난다. 시고쿠의 세 장로가 초빙되어 타마 숲의 너구리들과 합동으로 펼치는 요괴대작전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클라이맥스다. 여우 결혼식에서 전통적인 요괴까지 일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괴담과 잔살들이 총동원되어 판타스틱한 퍼레이드를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너구리들의 요괴대작전은 그저 사람들을 즐겁게 할 뿐이다. 너구리들의 둔갑술은 괴담이 아니라 진기한 구경거리일 뿐이다. 너구리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현실의 법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한다. 다카하다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통하는 것도 바로 그 최소한의 믿음이다.

1994년에 만들어진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10여년 전의 작품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발불명>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잔뜩 보아온 관객으로서는, 조금 서툴고 촌스러운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전언(轉言)만은 지금도 변치 않는다. 인간과 맞서 싸우는 너구리들은,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면서 몇개의 집단으로 나뉜다. 곤타를 대장으로 한 강경파들은 일종의 테러를 시도한다. 변신을 할 수 없는 보통 너구리들은, 노승을 따라 춤추고 노래하는 종교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현실적인 너구리들도 두 부류가 있다. 변신술에 가장 능했던 쇼우키치는 인간의 모습으로 가족을 이루어 살아간다. 폰키치는 너구리 그대로의 삶을 원한다. 크게 원하는 것 없이, 자연의 원형을 살린 공원의 한구석에서 여전히 과거와 같은 잔치를 벌이면서 흥겹게 살아간다. 어느 것이 가장 올바른 삶의 방식일까? 정답은 없지만, 다카하다 이사오는 결말에서 분명하게 방점을 찍어준다. 쇼우키치와 폰키치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앞뒤 같은 존재이다. 자신의 즐거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인간보다 인간적인 너구리의 길인 것이다.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세계

명작동화에서 사실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추억은 방울방울>

<반딧불의 묘>

도에이동화에서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다카하다 이사오는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간머리 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등을 만들며 명성을 날린다. 하지만 단지 명작동화에 만족할 수 없었던 다카하다 이사오는 후배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1985년 지브리 스튜디오를 만든다. 또한 다카하다 이사오의 작품도 점점 사실적인 이야기로 변해간다.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각색한 <첼로를 켜는 고슈>는 동화에서 사실적인 애니메이션으로 변화하는 다카하다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1988년에 만든 <반딧불의 묘>는 폭격으로 엄마와 집을 잃은 남매가 방황하다가 결국 죽어간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희생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그렸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반딧불의 묘>는 반전사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반딧불의 묘>의 남매는 분명 희생자다. 그러나 핵폭탄의 희생자를 추모하며 그 참상을 선전하는 이면에 분명한 음모가 있는 것과 달리 <반딧불의 묘>는 미군의 폭격 자체를 적이라고 설정하지 않는다. 군국주의와 거기에 동조한 어른들의 사악함과 무관심이 남매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모든 것은 내부의 모순에서 비롯된다. 남매의 적은 미국이 아니라, 일본사회 자체다.

<추억은 방울방울>(1991)은 도시생활에 지친 OL이 시골에 가서 겪는 일과 과거의 회상을 유려하게 엮어낸 작품이다. 애니메이션보다는 영화나 드라마가 더 적당할 것 같은 소재이지만, 다카하다 이사오는 소소한 일상의 정겨움과 과거의 그리움을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안에 훌륭하게 포획해냈다. 도시보다는 농촌, 서양보다는 동양, 혁신보다는 전통에 천착했던 다카하다 이사오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99년에는 전통적인 셀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네컷만화를 보는 듯한 기분으로 만들어진 <이웃의 야마다군>을 만들었다. 서민적이고, 풍자와 익살이 다카하다 이사오의 주무기임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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