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표지를 보고 어디서 본 장면인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맞다. <영웅본색>이다. 갑자기 <영웅본색>을 패러디한 표지를 찍은 건 <씨네21>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다. 특별한 표지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댄 결과다. 이번호에 이어 진짜 창간 10주년 기념호인 500호와 501호에도 패러디 표지는 이어진다. 어떤 장면이 어떻게 찍힐지, 두둥 기대하시라. 손홍주 사진팀장은 요즘 이 표지 준비 때문에 녹초가 됐다. 그래도 <씨네21>의 10주년을 특별하게 만들고 싶다는 열의가 끓어올라 주체할 수 없는 눈치다. 병원에서 수술하러 오라는데도 안 가고(실은 못 가고) 버티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왜 우린 늘 시간이 없는 걸까, 되묻게 된다. 어렸을 때는 일중독이라는 말이 참으로 이해가 안 갔다. 오죽 할 게 없으면 일에 중독이 될까, 싶었는데 요즘엔 일중독에 빠지지 않고서 사회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싶다. 가끔은 마약 끊고, 담배 끊고, 술 끊고, 모든 중독 증세에서 해방되라는 캠페인들이 모두를 일중독에 끌어들이려는 조직의 음모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창간 10주년을 맞아 이번호부터 소폭의 개편을 했다. 먼저 전영객잔은 영화잡지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영화비평을 강화하려는 의지의 소산이다. 허문영, 김소영, 정성일, 세분 영화평론가가 한주씩 번갈아 맡을 예정이다. 이따금 이젠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전혀 그릇된 말은 아니지만 나는 이럴 때일수록 비평이 제 몫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평 없는 영화계란 고작해야 우리 시대의 정신적 빈곤을 보여줄 따름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TV 지면에도 TV 비평 코너를 만들었다. 강명석씨는 그간 다른 여러 매체에서 드라마평을 썼던 분이고, 이미경씨는 <스카이 라이프>와 <허스토리>에서 필력을 보여준 바 있다.
칼럼은 새 필자를 맞았다. 이창의 문을 닫은 자리에 숏컷을 신설했는데, 아마 많은 독자분이 김봉석, 최보은 두 필자를 기억할 것이다. 숏컷의 원조였던 영화평론가 김봉석, 아줌마 vs 아줌마 코너를 뜨겁게 달구었던 최보은, 두분이 번갈아 집필한다. 숏컷 지면에 들어가는 네컷만화 <도라 도라 시장>도 유심히 지켜보시길 바란다. 석동연씨는 <얼토당토> <말랑말랑> 등으로 네컷만화의 진수를 보여준 만화가다. 시장에서 볼 수 있는 풍경에서 여러 가지 귀여운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겠다고 한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차례 지면에 새로 생긴 포토에세이도 놓치지 않았으리라. 영화현장 안팎에서 좀처럼 렌즈에 들어오지 않았던 인상적인 풍경을 잡아낼 예정이다.
지면 디자인도 이것저것 손보고 나니 봄맞이 대청소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대적인 혁신은 없지만 이번 개편에 뚜렷한 방향은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글의 힘을 믿는다’일 것이다. <씨네21>에서만 볼 수 있는 좋은 글을 더 많이 싣겠다고 독자 여러분께 약속드린다. 아마 더 좋은 글, 더 좋은 사진, 더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면 우리의 일중독도 병이 아니라 약이 될 것이다. 하긴 알코올중독자한테 알코올만큼 행복을 주는 게 달리 있겠는가. 우리에겐 그게 조직의 음모에 맞서는 최선의 길 같다.